"유대인을 죽여라!" 프랑스 폭민(暴民)은 나치 돌격대의 예고편이었다
||2024.07.20
||2024.07.20
[드디어 드레퓌스가 군사법정에 섰습니다. 재판은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적에게 국경을 열어 독일 황제를 노트르담 성당까지 안내한 반역자라도 이보다 더 쉬쉬하며 재판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기소장인지요! 이런 기소장으로 한 인간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다면, 그야말로 불의의 극치입니다. 저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기소장을 읽고 저 '악마의 섬'에 갇혀 말도 안 되는 속죄를 강요당하고 있는 한 인간(드레퓌스)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반항의 외침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장담합니다](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05, 93-94쪽).
윗글은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가 쓴 논설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일부다. 졸라가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의 작품들을 읽지 않았어도, 1898년 1월13일 프랑스 신문 <로로르〉에 실린 '나는 고발한다'는 논설 제목만큼은 들어봤을 듯하다. "나는 한 정직한 인간으로서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졸라의 외침은 국경을 넘어 널리 퍼졌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뉴욕 헤럴드>지에 이렇게 썼다.
"겁쟁이·위선자·아첨꾼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니홀라스 할라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한길사, 1983, 193쪽).
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인 작가 니홀라스 할라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역작(원제목은 Captain Dreyfus, The Story of Mass Hysteria, 1955)을 냈다. 부제목에 '집단발작'(Mass Hysteria)이 들어가 있는 데서 짐작되듯이,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 무렵의 프랑스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졸라가 그의 글을 <로로르〉편집국에 보낼 때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것을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문 투로 바꾼 이는 편집국장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총리)였다. 가뜩이나 휘발성이 높은 글에다 '나는 고발한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언론사 수습기자 교육 때나 신문방송 관련 학과 수업 때면 흔히 나오는 얘기다).
공화파와 반공화파의 갈등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군 포병대위로 참모본부 소속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에겐 군 기밀을 적에게 넘긴 혐의가 따랐다. 1894년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프랑스군 정보가 담긴 명세서를 건네주고 돈을 챙기려했다'는 혐의였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졸라의 글은 폭발적인 화제와 더불어 엄청난 찬반 논란을 빚었다.
프랑스혁명을 겪은 뒤 19세기의 프랑스에는 두 세력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권과 평등권에 바탕한 공화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공화파 인물들과 언론, 다른 하나는 공화정에 반감을 지닌 구 귀족 가문의 장군과 장교들, 예수회를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바라는 가톨릭 성직자들, 그리고 이들과 이념을 같이하는 반동적인 보수 언론들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대체로 전자는 드레퓌스 옹호파, 후자는 반(反)드레퓌스파로 갈라졌다.
양극화된 프랑스-이것이 19세기 말 프랑스의 모습이었다(큰 틀에서 보수-진보로 갈려 갈등을 빚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글을 읽어나가길 권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를 싸잡아 비난하는 시위와 더불어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할라스는 당시의 혼란상을 이렇게 썼다.
[낭트와 보르도, 몽펠리에, 르아브르, 오를레앙 등에서 대규모 군중이 유대인 상점들을 약탈했고,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그들은 졸라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공개리에 불태웠으며 졸라의 초상을 목매달았다. 파리의 군중들은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는 깃대를 들고 대로를 행진했다.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고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한 달 이상 전국의 도시들이 소요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이 유혈을 막을 힘이 없어 군대가 출동해야 했다](니홀라스 할라스, 193쪽).
드레퓌스와 강기훈
그렇다면 에밀 졸라는 누구를 고발한다는 것일까. 먼저 드레퓌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프랑스 국방부를 고발했다. 그는 주장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방부 사건'이라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은 (나중에 정작 독일대사관에 기밀정보를 팔아넘기려 했던 진범이 나타났음에도) 진상을 밝히려들지 않고 쉬쉬하며 덮으려 했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격문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반유대주의자들이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군부는 <레클레르> 같은 반유대 성향의 보수 언론들과 손을 잡고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을 부추겼다. 졸라는 이를 두고 '반유대주의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범죄행위'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한 3명의 필적 전문가를 고발했다(드레퓌스가 독일 간첩이라는 증거는 그가 넘기려 했다는 프랑스군 기밀정보 명세서에 나타난 필적이 전부였다).
[저는 세 명의 필적 전문가(벨롬, 바리나르, 쿠아르)를 고발합니다. 의료 진단에 의해 그들의 시력과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음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들이 날조된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에밀 졸라, 107쪽).
(아마도 독자 분들 가운데는 뭔가 익숙하다는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다름 아닌, 1991년 5월 노태우정권 때 일어났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드레퓌스와 마찬가지로 옥살이 끝에 뒤늦게 무죄로 결론이 나긴 했지만, 누구의 필적이냐를 놓고 큰 논란을 빚었다.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던 이가 남긴 유서가 대필이라 판단했던 문서분석 전문가는 1995년 사기범들과 짜고 토지문서를 허위 감정해준 혐의로 구속돼 눈길을 끌었다.)
독일 간첩 만들어낸 반유대 정서
1894년 12월 파리 사관학교 법정에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해를 넘긴 1895년 1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는 드레퓌스의 불명예 퇴역식이 열렸다. 몸집이 큰 선임 하사관은 그의 제복 어깨에서 견장을 거칠게 뜯어냈고,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두 동강 냈다. 법정 밖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드레퓌스에게 죽음을!",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쳤고,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부러진 칼을 든 드레퓌스 동상이 노트르담 드 샹 지하철역 출구와 파리 유대인 미술사박물관 마당에 서있다).
드레퓌스는 알자스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장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1871년 프랑스가 프러시아(독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알자스-로렌 지방이 독일에게 넘어가자, 스위스를 거쳐 파리로 옮겨왔다. 드레퓌스 가족들은 유럽 백인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생각을 지녔다. 원래의 성(리브만)도 드레퓌스로 바꾸었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드레퓌스 자신도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재산을 얼마나 축냈는지를 군대 동료들에게 줄곧 자랑삼아 떠벌리곤 했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22, 225쪽 참조).
사건의 진범은 낭비벽이 심한 노름꾼인 프랑스군 대대장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백작)이었다. 그는 1894년 7월 파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군사정보를 팔아넘기려고 흥정을 했고, 전달예정인 정보 목록을 적어놓은 문서를 건넸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문서가 프랑스군 방첩부대로 넘어갔다.
여기서 프랑스 군부의 반유대 정서가 한 몫 했다. 방첩부대장 상데르 대령은 드레퓌스와 같은 알자스 출신으로 독일과 유대인을 혐오하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반유대주의자였다. 문제의 문서를 들여다보며 누구의 필적일까 생각하던 중에 곁에 있던 또 다른 반유대주의자 웨베르 앙리 소령이 드레퓌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상데르는 무릎을 탁 쳤고, 드레퓌스는 곧 붙잡혔다.
문제는 문서에 나타난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프랑스군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기소를 망설였다. 그러자 반유대주의 신문 <리브르 파롤>이 불을 당겼다.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붙잡혔는데 참모본부가 이 '매국노'를 감싸주느라 기소를 망설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보수 신문들도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당황한 참모본부는 드레퓌스를 반역 혐의로 서둘러 재판에 넘겼다. 무기형 판결 뒤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 갇혔다. 여기까지가 드레퓌스 사건의 1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