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삶] 전통연희의 연극적 수용을 기다리며
||2024.10.24
||2024.10.24
1992년, 뉴욕, 런던 등 외국 생활을 접고 5년 만에 귀국해보니 한국연극계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문화예술회관(현 아르꼬극장)대극장 로비에서 무대장치협회 주최 무대장치샘플링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5년 새에 연극협회만 있던 연극계에 무대장치협회가 따로 생겼구나 감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배우협회, 연출가협회도 생겼다는 소식을 한꺼번에 접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희망 같은 걸 느꼈다.
협회하고는 거의 무관하게 활동해 온 필자는 연극계가 체계적인 조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연극협회와 분야별 협회가 '따로 또 같이' 뭔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귀국 초기 필자의 예측과 그러길 바라는 기대감이었다.
필자의 귀국 소식을 접한 연출가협회는 협회의 연중 사업인 '중견작가 단막극제' 참가 의뢰를 했다. 귀국 후 필자는 뉴욕대 대학원과 영국에서 수학한 교육연극(Educational Theatre)을 전국을 돌며 처음으로 알리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었지만, 늦게나마 연출가협회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직접 쓴 작품으로 참가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1986년에 세종소극장(현 M씨어터)에서 처음 굿의 형식에 담은 꼭두극(왼길 오른길 하늘길)을 쓰고 연출한 후, 귀국해서 두 번째로 굿의 형식을 담은 실험적인 무대(개나리 꽃밭에서 기념사진을)를 시도하였다. 내용은 통일이 되는 날, 휴전선으로 달려가 모든 전쟁희생자의 넋을 위로·천도하는 연극적 굿판을 벌인 후, 대한민국 국민이 모여 긴 철조망을 노랗게 물들이는 이벤트와 무대미술가들이 노란 철조망을 절단하며 개나리 가지로 조형하는 이벤트를 벌인 후, '휴전선이 있던 자리' 팻말을 꽂은 사진사가 등장하여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구상은 일찍이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조형미술 전시에서 필자의 시선이 꽂힌 작은 조형작품에 기인한 것인데, 언제 통일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막연해서 잊어버리기 전에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장소는 차 없는 거리인 대학로 노상에서 하길 바랐지만, 결론은 연출가협회가 대관해 놓은 성좌소극장으로 정해졌다. 결국 '통일이 되는 날엔 꼭 휴전선 현장에 가서 다시 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소극장용으로 연출했다.
필자는 연극, 꼭두극, 오페라, 창극, 무용극, 국악무대, 한국무용, 합창과 교육연극의 TIE극까지 지난 50년간 100여 편의 다양한 무대를 연출해왔다. 그런데 딱히 고집하는 한 가지는 우리나라 전통연희를 연극에 수용하는 것이다. 공연예술장르를 보면 '한국춤과 발레' '창극과 오페라' 등 쉽게 구분되는 '우리나라와 서양'의 것이, 유독 연극만은 이에 견줄 '우리연극'은 현재 없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기회가 오면 굿의 형식을 다양하게 무대 위에서 실험한다. 굿 속에는 다양한 전통연희가 들어있고 지역별로 독특한 극적요소가 담뿍 들어있기 때문이다.
1995년 국립극단의 정기공연 연출은 그야말로 신나는 작업이었다. 국립예술단의 창극단, 무용단, 국악관현악단에는 전통연희의 고수인 단원들이 있었다. 연출자는 국립예술단 모든 단원들을 캐스팅 할 수 있고, 단원은 캐스팅되면 출연해야 하므로 굿의 형식을 제대로 무대 위에 연출할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게다가 사실주의 대본을 해체하여 굿의 형식으로 재창작하였다. 사실 춤 한 꼭지, 소리 한 자락 할 기능이 없는 대다수 국립극단 단원은 대사만 하는 서양 사실주의 연극에서 머물고 있어서 예술단 내 다른 단체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우리연극만들기' 실험을 지속해 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유일한 K-연극이 만들어져서 'K-연극과 서양연극'이 상호 발전하는 무대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슬프게도 필자의 작업은 평론가들의 문자로 된 평론 또는 논문으로만 기록되어 남아있다.
/박은희 연출가·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