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이 새롭다
||2024.11.26
||2024.11.26
세종대로 왕복 12차선을 건너서 광화문을 지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길게 이어진 돌담의 예스러운 멋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다. 세월이 묻어나는 절제미와 조상의 숨결이 잔잔하게 스며온다.
한편, 궁궐이 있는 동네에 어울리게 평일이나 휴일이나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할 것 없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거리를 거니는 문화도 즐길 수 있다. 보기 좋은 것을 알아보는 인파의 물결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한복이 드레스 같다고 비판을 하는데 의복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보기에는 나쁘지 않고 입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인다.
대학시절, 학교 근처에 큰 박물관이 있었다. 휴강이 되거나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그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래된 문화재들이 뿜어내는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한없이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몰랐었다.
요즘도 가끔 옛날 생각이 나서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아가는 데 매번 같은 장소이지만 방문할 때마다 새로움을 느낀다.
서울의 대표 관광지이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관람하기 위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면 경복궁보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먼저 만나게 된다. 원래 이 자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곳으로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함께 왕실의 문화를 시간순이 아니라 테마별로 살펴볼 수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는 일 없이도 왜 그렇게 사는 것이 바쁜지 아주 아주 어렵게 시간을 내어 딸과 함께 고궁박물관을 찾았지만 상설전시실은 개편 중이라서 관람은 1층 기획전시실과 지하 1층만 가능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작은 금강, 칠보산을 거닐다’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동시에 개최되는 이 전시는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소장한 ‘칠보산도병풍’을 디지털로 변환하여 공개한 전시다. 국외의 한국 문화유산을 디지털 영상 전시로 활용한 첫 사례라고 한다. 함경북도 명천에 있는 칠보산을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칠보산은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명산으로 불린다. 금, 은, 진주 등 7개의 보물이 산에 묻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상은 480년 전 함경도 회령부 판관 임형수의 발길을 따라가며 칠보산 ‘개심사’라는 사찰부터 여정이 시작되는데 기와 모양의 사암, 폭포가 흘러내리는 금강굴, 산의 모든 형상을 볼 수 있는 회상대 등 병풍에서 볼 수 있는 명승지를 함께 여행하게 된다. 비가 오고 눈 내리는 중에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임형수의 깊은 감동을 배우 류준열의 담백한 내레이션과 함께 느낄 수 있다.
천만 영화보다도 감동적인 영상을 보고 나면 칠보산 절경을 10폭의 화면에 담은 병풍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쉽게 만날 수 없는 외국의 우리 문화유산을 보다 가까이서 향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문화재를 생각하면 아쉬움도 컸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해외 소재 문화재로서 지적재산권은 행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원래 주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저작인격권은 영원불변한 것이니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어느 누가 소장하더라도 우리 문화재라는 태그가 붙어 있을 것이고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고 누릴 수 있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은 언제나 고귀한 정신을 보여주며, 그 정신은 불로장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하 1층의 대한제국관을 마저 둘러보고 상설전시실 개관 이후에 다시 새로워질 박물관을 떠올리며 출입문을 나섰다.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딸은 기념품 가게에서 거북선 퍼즐 한 권도 구매했다. 가격은 1만원으로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비싼 편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듣는 ‘오래된 것이 새롭다’라는 것은 ‘오래 돼야 새로워질 수 있다’고 반어적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 전 작품이 디지털 영상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쩌면 오래되었기에 나오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구하고 긍엄한 박물관에서 맛보는 영상이 최신 서라운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보는 영상보다 감개무량하게 다가오는 것은 엄숙함에서 즐거움이, 클래식에서 모던이, 역사에서 스토리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이 나오는 것과 다름아니다.
오래됨의 미학은 처음 새것이었을 때의 존재감을 계속 유지하면서 세월의 묵직함이 더해져 가볍고 일회적인 일들의 연속인 일상에서 대면했을 때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그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마 박물관의 문화재들이 으뜸이지 않을까 한다. 시간적으로 오래되었어도 낡고 해어진 것이라면 오래된 새로움이 덜할 것이다. 다만,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이라도 신뢰와 사랑으로 이어온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새것에도 그 가치는 계승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