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창] 교수들의 시국선언

인천일보|김석원|2024.11.28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1980년대 초 대학에는 '짭새'(사복경찰)들이 캠퍼스뿐만 아니라 교양과목을 듣는 대형강의실에도 앉아 신문을 보고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어쩌다 대학에서 피(전단지)라도 뿌리면 짭새들이 싹 걷어가고 시위 관련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고 잡아갔다. 여학생 머리채를 잡아끄는 것은 예사고 남학생들은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져 진짜 피를 흘렸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군사 정권이 아무리 발악해도 민주주의의 새날이 올 것을 믿고 있었다. 학생들은 분신하고, 공공 건물을 점거하고,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위 있는 날, 교문을 돌파하려는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너희들 나가면 다친다”고 말씀하시던 교무처장과 학생처장, 과 중진 교수님들이 생각난다. 그 분들은 학생들이 다칠까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4·19혁명 때 학생들이 총탄에 쓰러지고 치열한 투쟁 끝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던 250여 명의 교수님들 시국선언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었다.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으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1987년 6월 항쟁은 다시 한번 전 국민이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종교인, 노동자, 학생, 회사원, 주부, 노인 등 거의 모든 계층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국민의 의지와 뜻을 보여주었고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에 한발 더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의 시위를 말리던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은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교수님들을 진정 존경하게 했다.

여학생은 체육복, 남학생은 교련복, 복학생은 예비군복을 입고 싸우자는 총학의 말을 듣고 예비군복을 입고 며칠간 학교에 갔던 기억이 있다. 지역 활동을 하자던 지침을 듣고 인천으로 내려와서 시위에 참여했는데 시민회관 쪽에서 법원으로 가자는 구호를 듣고 그 동네 지리를 잘 아는 필자가 대형태극기를 들고 법원 쪽으로 뛰는데 뒤를 돌아보니 수백 명이 따라와서 태극기를 가슴속에 숨긴 기억도 있다. 군대 동기는 선임하사가 제대하여 백골단이 되어 시위에서 만났는데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무용담을 했다.

여러 대학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을 보며 묘한 생각에 잠긴다. 2024년 11월27일 현재 전국 70여 대학교 3400명 이상의 교수님 시국선언이 있었는데 열혈 청년들의 시위는 미미하다. 주사파나 사회주의로 기울던 운동권의 영향으로 대학에는 학생운동이 아예 소멸한 것 같다.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바른 정치, 사회 문제에 관한 학생들의 올바른 인식, 환경 문제, 소수자 문제, 우리 것을 찾는 문화운동 등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1980년대만 해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면 교수님들이 말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시국선언을 했는데 요즘은 교수님들이 전국 여러 대학교에서 아무리 시국선언을 해도 학생들은 조용하다. 요즘 대학가에서 나오는 교수 시국선언은 1980년대 학생들의 전단보다 더 강렬하고 명문이다.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을 하나하나 읽었는데 경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교수선언을 읽다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2004년 오렌지혁명이라고 일컫는 우크라이나 부정선거 시위에서 필자는 한국의 4·19와 6월 항쟁을 이야기하며 학생들과 더불어 흐레샤칙 거리로 나섰다. 2014년 시위에서도 학생들에게 조국의 운명은 젊은이들에 달려있다고 강조하며 휴강하고 학생들과 같이 시위에 동참했었다.

세계 어디서나,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불의를 못 참고 일어서 시위에 참가할 때 열기가 붙고 힘이 모이고 분출된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라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조국 수호를 위해 전선에서 싸우고 있고 일부는 전사하여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1인 시국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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