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와 멋대로 살기
||2024.12.25
||2024.12.25
패거리의 힘에 의지해 이익을 얻고 조직의 권력에 영합해 이득을 취하는 집단주의와 달리 개인주의는 독자적으로 삶의 의미를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도록 한다. 세포가 각종 바이러스나 세균 등 끊임없는 외부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장치가 면역체계다. 적의 침투를 막고, 이미 침입한 이물질을 몰아내거나 제거하는 능력의 정도가 이 시스템의 성능에 달렸다.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은 면역체계 손상으로 내 세포가 외부에서 침투한 다른 세포를 구분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아군과 적군이 식별돼야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를 척결할 수 있듯이, 내 몸의 세포를 인지할 수 있어야 낯선 세포를 경계하고 막을 수 있으며 침범한 이질적인 세포를 추적해 제거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장기이식 후 발생하는 염증 반응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면역억제제가 필요한 것도 낯설고 생소한 기관의 유입으로 혼란을 겪는 면역체계의 거부 반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서다.
분주하고 겨를이 없을수록 내가 누구인지 살피고, 조급하고 심란할수록 내가 누구인지 성찰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는 시간의 한도가 정해진 일시적인 신분이며 법적 효력이 다하면 내려놓아야 하고, 세월이 흐르면 사라지고 마는 내 실체나 본질과는 무관한 임시적인 자리에 불과하다. 아기가 엄마의 출현에 울컥하고 할아버지가 손주의 등장에 감격하듯이 예컨대 봄바람에 설레고 주변의 위로에 뭉클하며 몸소 쓴 자작시에 감동하는 주체가 진짜 자기다. 그런 자기 발견이나 회복이야말로 어떤 허탈감도 견디고 어떤 외로움도 떨칠 수 있는 삶의 의욕과 열정을 제공한다.
성숙한 개개인 없이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고 사회의 안정을 기약하며 국가의 번성을 구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는 인간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장치임에 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무리의 유익을 앞세워 개인의 인격을 훼손하고 분쇄하기 십상이다. 집단과 타협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행태로는 자가 발전의 동력을 얻기 요원하며, 결국 타율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나는 사라지고 사회적 일원으로 활약했던 초라한 개인만 허탈한 과거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약하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진해 움직일 수 있는 본인만의 동력을 갖춰야 거대한 세상의 중력 속에서 본연의 정체를 남에게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두드러진 존재감을 주변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노자는 ‘無爲而無不爲’라고 하여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는 멋대로 살라는 것인데, 물론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특정한 신념에 포획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에 다름없다. 무기력은 삶에 대한 능동적 선택이 제거되고 자발적 결정이 박탈된 상태에 오래 노출되면 발생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직접 차를 몰면 그렇지 않지만 남이 운전하는 차에 오르면 지루함은 물론이고 졸음에 시달리고 멀미에 부대끼는 것도 마찬가지 증상에 해당한다.
한편, 국가가 공짜로 퍼주거나 나눠 준 돈보다 개인이 직접 번 돈이, 강제로 국가에 세금으로 지불하는 돈보다 자율적으로 개인이 소비하는 돈이 궁극적으로 더 큰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런 사실은 지금은 더구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협력의 시대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의 시대며,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도 되는 획일적 시대가 아니라 소수의 돌출된 개성을 다수가 이해하고 수용하는 개별적 시대라는 점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점을 간과했던 사회주의는 그래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개인주의가 몰고 오는 고립이 아닌 고독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움을 느끼는 사람만이 그 삶이 기적임을 알게 된다. 마음 저리고 가슴 시린 간절한 추회(追懷)가 있어야 내 주변과 가족을 비롯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룬 성과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감사해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런 사태를 경험하는 일은 나의 존재 이유를 다시 발견하고 존엄의 의미를 재차 확인하게 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