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2024.12.26
||2024.12.26
얼마 전 학교에서 TCI 검사와 홀랜드 검사를 받았다. 졸업 전 학교에서 해 볼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한 시간 내외 정도 검사를 마치고 일주일 뒤 결과를 들으러 갔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질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발달한 성격이 이것과 완전히 반대로 기능하며 나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맺고 적절히 사회생활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남을 의식하지 않는데 후천적으로 성격 기능이 발달했다니.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왜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남의 말에 전혀 휘둘리지 않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신경을 쓰는 걸까? 그것은 내 기질과 성격의 충돌 때문이었다. 천성이 무던하게 태어나 예민하게 자랐다. 최근 알게 된 ‘Highly Sensitive Person(HSP)’ 개념에 따르면 나는 꽤나 예민한 사람이었다. MBTI는 대문자 I 내향형이지만, 처음 만난 사람은 대문자 E로 알 만큼 활발하기도 하다. F(감정형)와 T(이성형)가 제법 균형 있게 발달했으며, 별자리는 황소자리에다가 혈액형은 한때 ‘단’순, ‘무’식 단무지 O형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왜 자꾸만 스스로 정의 내리고 싶어 할까? 혹은 어딘가로 분류해서 소속되고 싶어 하는 걸까. 어째서일까? 왜 MBTI E이고 싶어 하는 걸까, I이고 싶어 하는 걸까. F가 돼 T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고 싶어 할까, T가 돼 F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고 싶어 할까. 사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나를 가꾸는 일의 일종인 것이다. 나는 결국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 역시 삶에 있어 많은 부분이 편해졌다. 살면서 두 번의 사춘기를 세게 겪었다. 초등학생 때 한 번, 대학생 때 한 번.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몸과 마음에서 점점 자라 커다란 물음표 모양으로 줄기를 뻗었다. 그곳에 피어난 이파리 하나마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질문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기에 나에 대해 알아야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러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때 앞서 설명한 다양한 유형과 분류가 큰 도움이 됐다. 우스울 만큼 간단한 검사도, 출처가 불분명한 질문들도 전부 좋았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도 꼭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타입이다. 완전히 정확했다. 나라는 사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랑에 빠졌을 때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적용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사랑한다면 더 많이 알고 싶을 뿐이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더 많이 알아야 할 것이다.
단단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그 시절 나를 괴롭히던 혼란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줬다. 성인이 되고도 끝나지 않았던 내면의 소용돌이를 멈춰 줬다. 결국에는 내가 자신을 위한 구원자가 된 셈이다. 누구도 아닌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다. 내가 나를 믿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변수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절대 변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나를 끝까지 믿는 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깊은 고민을 하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 한다. 나를 믿고, 사랑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