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리에 25만원짜리까지... 비싸서 한때는 뇌물용으로 쓰인 한국 생선
||2025.03.23
||2025.03.23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구수한 풍미, 황금빛 윤기가 흐르는 자태. 밥상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굴비는 단순한 반찬을 넘어 한민족의 입맛과 역사를 담고 있는 특별한 존재다. 전남 영광군 법성포의 자랑이자 오랜 전통을 품은 보존식품이자 밥에 얹으면 저절로 손이 가는 ‘밥도둑’인 굴비. 예로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귀한 음식이자 오늘날까지도 명절 선물로 손꼽히는 굴비에 대해 알아봤다.
굴비는 참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이다. 전통 굴비 제조법은 간단하면서도 까다롭다. 먼저 일정 크기 이상의 큰 조기를 골라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소금에 절인다. 영광 현지인은 큰 조기를 써야 상품성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작은 조기는 말리면 쪼그라들어 볼품없기 때문. 소금에 절인 조기는 끈으로 엮어 해풍에 말리는데, 이 과정에서 햇볕과 바닷바람이 생선의 수분을 날리고 감칠맛을 더한다. 건조 과정은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까지 걸린다. 너무 오래 말리면 퍽퍽해지고 기름이 배어 나오면 상해서 폐기된다. 수율이 낮은 이유다. 이렇게 꾸덕꾸덕하게 마른 굴비는 백화점이나 전문점에서 고급품으로 팔린다. 생조기를 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쫀득한 식감을 자랑한다.
현대식 속성 제조법은 다르다. 냉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굴비도 변화를 맞았다. 소금을 적게 쓰고 건조도 하루에서 이틀만 냉동 창고에서 한 뒤 소금을 씻어내 포장한다. 심지어 염장 후 얼린 상태로 유통하기도 한다. 생조기와 차이가 거의 없는 까닭에 요즘 굴비는 굴비가 아니라며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전통 굴비는 단백질이 분해되며 생기는 감칠맛과 건조로 농축된 풍미가 특징인데, 속성 굴비는 이 과정을 생략해 맛이 아무래도 많이 덜하다. 영광뿐 아니라 목포, 진도, 여수 등 전남 지역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굴비를 만든다. 다만 영광은 조기를 엮어 말리는 전통을 고수하며 다른 지역과 차별점을 둔다.
영광이 굴비로 유명한 이유는 지리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법성포는 황해와 맞닿은 항구로 조기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어선이 모여 그물로 조기를 잡는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의 해풍과 햇살은 굴비를 말리기에 최적이었다. 적당한 바람과 일조량이 생선의 맛과 텍스처를 살려줬고, 1년 이상 묵힌 천연 소금을 써서 염장하며 품질을 높였다. 이런 조건 덕에 영광 굴비는 다른 지역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영광 굴비가 꼭 영광 참조기로 만드는 건 아니다. 남획으로 칠산 바다에서 거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추자도 인근에서 조기를 들여와 영광에서 말린다. 인근 지역에서 잡힌 걸 유통하며 영덕 대게란 이름을 붙이는 것과 유사하다.
굴비는 비싸다. 그 가격은 품질과 제조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전통 방식으로 꾸덕하게 말린 굴비는 생산량이 적고 폐기율이 높아 값이 매우 비싸다. 영광 법성포에서 20마리 한 두름(전통 단위)은 10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다.
백화점에선 10마리에 보통 15만 원을 넘기고 특품은 30만 원에 육박한다. 최고급 영광 법성포 굴비는 10마리 1.2kg 내외에 15만 원 정도부터 시작한다. 3.5kg 10마리 세트가 250만 원이나 나가는 경우도 있다. 고추장 굴비는 더 비싸다. 300g에 하급이 3만 원, 상급은 6만 원 이상이다. 이 때문에 굴비는 한때 뇌물용으로 쓰였다.
속성 방식으로 만드는 굴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해 10마리에 5만~8만 원 선이다. 조기 대신 부세를 쓴 굴비는 30% 정도 싸다. 부세는 참조기와 맛이 비슷해 대체재로 쓰이지만, 중국 수요가 증가하며 가격 차가 줄었다.
굴비는 과거엔 흔했지만 지금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찾는 음식이다. 한때 청탁금지법으로 선물 수요가 줄었으나 농수산물 15만 원 이내 허용 개정으로 숨통이 트였다. 조리법도 다양하다. 마른 굴비는 쌀뜨물에 1시간 불린 뒤 찜통에 쪄 먹으면 쫀득하고 짭짤하다. 찐 후 살짝 구우면 바삭함이 더해진다. 삶거나 찌개로 끓이면 짠맛이 덜하다. 속성 굴비는 그냥 구워 먹기 편하다. 건어물 특유의 냄새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감칠맛에 익숙해지면 매력적이다.
굴비엔 이야기가 많다. 이자겸이 법성포 유배 중 소금에 절인 조기를 인종에게 보내며 “진상은 해도 굴한 것은 아니다”라고 쓴 게 굴비(屈非)의 유래라는 설이 있다. 국어학계는 조기를 엮어 말리며 허리가 굽는 데서 ‘구비’가 변했다는 설을 제시한다. 전남에선 굴비를 ‘엮거리’라 부르며, 지역마다 묶는 방식과 형태로 구분한다. 자린고비 설화에선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간장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1985년 공익광고는 이 장면을 살려 저축을 장려했다. 영광군은 자린고비가 굴비를 씹는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굴비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야구 선수 헨리 소사가 매우 좋아한 음식이기도 하다. 그는 굴비를 좋아해 한 번에 37마리나 먹는다고 밝힌 바 있다. 소사는 더스틴 니퍼트와 함께 8년(2012~2019) 동안 한국 리그에서 뛴 최장수 용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