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2025.07.23
||2025.07.23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국민들은 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이것을 좌경용공세력이 악용하여 국민들을 혹세무민하는 수단으로 사용), 집회결사의 자유(좌경용공세력이 악용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의 목을 죄어오는 상황이 되어 집회결사의 자유를 법을 이용하여 막으려고 하는 위선과 추태를 보이고 있음,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술수) 가 있음에도 이러한 당연한 권리의 필요성에 대해서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인류의 사상적 오류가 그득하게 동반된 이론적 모순덩이로 일찍이 중국 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에서 전쟁으로 번지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종국에는 자신들의 체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 공산당식 문화혁명, 이른바 폭력과 살인을 동반한 행동과 전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심한 혼란된 상황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뼈져린 각성이 요구되는 바이며 1970년대 후반에 있었던 전쟁의 이유에 대한 분석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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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78년에 이미 국경 분쟁을 겪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 공산당이 700번 이상 무력도발을 해왔다고 주장하였고, 베트남 공산당은 중공이 자국 영토를 2,000번 이상 침입했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의 주장은 언제나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1978년 한 해 동안 양국의 무력충돌로 인한 사상사는 수백 명에 달하였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에 1979년 2월 17일 이 날의 중공군 월경은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준비되고 의도된 침공이었습니다. 이는 중공군이 벌인 본격적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베트남은 두 나라 모두 공산국가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의 전쟁은 당시로서는 예상밖의 일이었습니다.
공산당이 독재하는 공산국가는 無産階級(무산계급) 즉 Proletarier(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인 나라입니다.
bourgeoisie(브루주아, 유산계급)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국의 노동자는 서로 단결하여 자본가의 지배를 뒤엎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 본격적인 군사력을 투입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자생적 공산주의, 사회주의자 옹호론자들과 북괴와 내통하는 좌경용공인사들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공산국가들 사이에 군사력을 투입한 무력충돌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1969년 3월 2일 흑룡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乌苏里江, река Уссури) 의 다만스키 섬(珍寶島, о́стров Дама́нский) 에 주둔한 소비에트 국경 경비대를 중공군이 기습 공격해서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던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 1969년 3월 2일 우수리 강 다만스키 섬에서 벌어졌던 중공군과 소비에트 국경경비대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1981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作)
소비에트 군은 곧바로 탱크, 헬리콥터, 다연장 로켓포 등을 동원하여 섬을 탈환하였습니다. 소련과 중공 양국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1969년 9월 10일에야 겨우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 1969년 3월 2일 다만스키 섬 전투에서 사망한 소비에트 국경 경비대원들의 장례식
1977년 4월 30일, 중공과 친한 캄보디아가 베트남을 공격하였습니다.
베트남은 1978년 크리스마스에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하였습니다. 중공의 베트남 침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보복이자 베트남을 양면전쟁 즉 2개 이상의 전선이 형성된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으로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오랜 대결의 역사를 갖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중국의 관점에서 고구려 등이 동쪽의 오랑케(東夷)라고 불렀고 베트남은 남쪽의 오랑케(南蠻)이었습니다.
중국을 둘러싼 4대 이민족, 동이, 서융(西戎), 남만, 북적(北狄)은 아무리 정복해도 굴복하지 않는 끈질긴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원나라의 공격을 3 차례나 물리친 대월제국(베트남) 장군 Trần Hưng Đạo ,(陳興道, 쩐흥다오)는 한국의 역사에서 나오는 강감찬, 이순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에게 중국은 철천지원수와 같은 숙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베트남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상 오랫동안 중국은 베트남을 조공국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베트남을 무력으로 병합하려는 시도도 여러 번 시도하였고, 실제로도 중국이 여러 차례 베트남을 점령하면서 중국 측에서는 베트남을 南越(남월)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대만이 병력과 군수물자를 남베트남 정부에 지원하려고 하였지만 남베트남 정부에서 거부한 일화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화교들의 경제적 장악을 우려한 것이었습니다.
선제공격의 이점과 병력상의 우위를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를 베트남군이 초기에 막기에는 그리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이후 20여 년 만에 실전에 참가한 중공군의 실력은 예상보다 약했습니다.
반면 베트남군은 프랑스군과 미군을 상대로 십수 년의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진 베테랑급 군인들이 가득하였습니다.
또한 명분이 약한 전쟁에 나선 중공군에 비해 조국을 지키려는 베트남군의 항전 의지가 더 강했습니다.
결국 중공군은 베트남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였던 Lang Sun(谅山, 랑선)을 1979년 2월 3일 점령 작전을 시작하여 초토화 시킨 후 3월 16일 베트남에서 철수하였습니다.
전쟁을 개시한 지 27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 1979년 2월 3일 베트남 랑선 도시를 침공하고 있는 중공군
중공군은 랑선, 城舖高平(까오방), 城舖老街(리오까이)의 3개 도시와 동당, 루핑, 간탕, 토랑, 하랑 등 17개 현과 시를 점령하였고 이 지역의 베트남 정규군과 민병대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하며 베트남군이 북부 지역에서 중공군에 대항하여 건설한 수많은 군사 시설을 파괴하였다고 합니다.
↓ 베트남 랑선 도시에 진입한 중공군 부대
중공군의 강력한 포병 화력은 베트남 군의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노이에 주재하였던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黎笋惊(레 주앙)은 베트남군이 외곽 진지를 포기하고 일부 고지대를 관측 지점으로만 남겨두도록 허용하게 한 후 베트남 주력 부대를 랑선성으로 후퇴하여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중공군이 랑선시로 들어오게 하여 공세를 지연시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 쿠바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는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레 주앙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 제 55군단 소속 제 163사단과 제 164사단이 선두에 서서 랑선 공격을 개시하였고 소규모 중공군 부대들이 베트남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고지를 포위하는 동안 중공군 주력부대가 랑선을 침공한 것입니다.
1979년 3월 1일 아침, 중공군은 랑선 도시를 포위하였고 중공군 9개 포병연대가 랑선을 향해 모든 포탄을 조준 발사하였습니다. 랑선 외곽에서 중공군을 기다리기 위해 주둔 중이었던 베트남 제 3사단 군은 중공군의 포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중공군은 오전 8시에 포격을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수만 발의 포탄을 발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랑선 북부 도시지역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포격이 끝난 후 중공군 제 163 사단이 가장 먼저 랑선으로 돌격하였고 베트남 제 3사단과 근접전을 벌였습니다.
↓ 베트남 군부대를 향해 조준 발사되는 중공군 포병부대의 다연장 로켓포 발사 장면(1979년 3월 1일 오전 8시경)
↓ 1979년 중공군의 베트남 랑선 점령 계획
랑산 전투에서 중공군은 1,200명의 군인이 사망하였고 4,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며, 베트남군은 3,000명 이상 사망하여 1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었는데 이후 알려진 정보들을 수합해보니 중국과 베트남 양국은 각각 최소한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어떤 이유로 시작했던 간에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감당하지 못할 막대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큰 소리친 중국 공산당의 자화자찬과 달리 베트남의 민병대와 2선급 부대들을 상대하면서도 중국 공산당의 주장과 달리 어려운 전쟁을 펼친 중공군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의 무기와 군수물품을 지원받은 북베트남 지도부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언제라도 베트남 땅으로 들어와 개입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미국의 베트남 참전보다도 중국 공산당의 참전에 더욱더 신경을 쓰고 경계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인들과 북베트남인들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태도 만큼은 일치했다고 합니다.
친중파였던 호치민(阮生恭)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자신들의 상전 노릇을 하려고 하였던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도리어 친미 노선을 취하였으며 심지어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였던 프랑스와도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 협정을 맺으려고 시도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된 베트남은 전쟁 이후 잔류하고 있었던 화교들의 재산들을 모두 몰수하고 추방시켰으며 국경 문제에 있어서도 소비에트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Camlann(캄란)에 위치한 해군 기지를 구 소련에 임대해주는 등 반중친소 노선으로 돌아서 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후 중국 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돌아서 버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결전을 벌였던 베트남을 지원해주었음에도 베트남 통일 후 중국 공산당을 적대시하는 베트남을 배은망덕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중국의 앞마당으로 여기던 동남아시아에 반중세력이 나타남과 동시에 구 소련까지 끌어들이려 하자 매우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 1979년 5월경, 베트남 캄란 해군기지에 정박한 소련 제 17함대 소속 Victor III class 공격 핵잠수함 671RTM 잠수함 승무원들
1978년 1월에는 이전부터 이어져 왔던 중국-베트남 국경 문제를 이유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외교정책과 관심을 줄이게 되자 캄보디아에 들어서 있었던 론놀 친미 정부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크메르 루즈를 이끌던 폴 포트는 극단적인 Maoism(마오이즘, 마오쩌둥 사상)에 빠져있었던 인물로 유례없는 폭력적인 공산화 정책을 수립하여 대학살을 시작하여 캄보디어 영토 전체를 킬링필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크메르 정권은 극렬 자민족중심주의를 내세워서 베트남계 주민들을 모두 학살, 제거해 버렸는데 이와 같은 행동은 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1979년 1월,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여 크메르 루즈 정권을 전복시키고 폴 포트를 정글로 몰아냈습니다. 그런 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鄧小平(등소평)과 華國鋒(화궈펑, 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은 베트남에 대한 무력 침공을 비밀리에 모의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의 해방을 명분삼아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이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베트남의 국방장관이었던 보응우옌잡(武元甲) 대장은 친중파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권한선상에서 물러났고 총 참모장이었던 반띠엔중(文進勇) 대장이 총 지휘를 하였습니다.
↓ 보응우옌잡 베트남 공산당 3대 국방부장(1911~2013) ↓ 반띠엔중, 베트남 공산당 인민군 총참모장(1917~2002)
중공군의 목표는 베트남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분쟁을 일으켜 캄보디아에 주둔한 베트남 부대들의 회군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의 주력부대들이 캄보디아 지역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지역은 거의 공백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을 침공한 중공군 부대들이 침공 당시 하노이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당시 베트남은 중공이 쉽게 공격할 수 있었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1979년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군의 병력 규모는 전세계 3위였고 1975년부터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지역에서 철수하는 1989년까지 베트남군의 총 병력수는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군수물자들이 상당했었습니다.
중공군은 초기에 6만 명의 병력으로 베트남 국경을 넘어서 전쟁을 벌였는데 그후 축차투입을 하여 20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동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1979년 2월 17일, 베트남 국경을 침공하는 중공군 부대들
그와 동시에 중공군은 100여 기의 군용항공기, 63식 경전차를 주력으로 앞세워 4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소수의 국경수비대 병력과 민병들로 구성된 병력들을 동원, 총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40여 기 미만의 항공기와 소수 기갑차량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막아야 했습니다.
↓ 중공군에 대항하여 폐허가 된 랑선 도심지에서 조준기없이 RPG-7을 발사하려는 베트남 3사단 정규군
중공군의 후퇴 이유
중공군은 1950년대의 사회적 혼란과 문화대혁명으로 군사용 통신장비나 전술 등이 한국 전쟁 이후로 발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베트남 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군사적 전술 교리를 베트남 현지 지형에 맞게 발전시켰고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중국군의 전술을 분석하였기 때문에 중공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놓고간 M113 보병전투장갑차 등을 이용하여 보병들을 빠르게 수송하여 배치하였고 거점을 중공군에게 빼앗기기 전에 중공군의 위협으로부터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투입하는데 기동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베트남군은 대전차미사일을 사용하여 중공군의 63식 전차 13대를 격파하였고 월남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F-5 전투기를 사용하여 중공군 항공기 15기를 격추하였습니다.
미 공군은 남베트남에 약 125대가 넘는 F-5 전투기를 남겨두고 1973년 미군이 철수하였는데 현재도 베트남 군사박물관에는 당시 남베트남, 북베트남이 사용하였던 F-5 전투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5년 12월에 남베트남 공군에게 F-5C 전투기가 일부 공여되었고 1972년 4월부터 F-5E 전투기가 공여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베트남 공군은 F-5A, F-5B는 정비가 어려웠기 때문에 F-5E를 주로 운영하였습니다. 심지어 F-5E 전투기는 F-5A 의 개조부품을 교체해서 90년대 초까지 비행운용하였습니다.
현재 이란이 보유하고 있는 F-5 기종의 수리를 위한 F-5 메인 프레임과 동체와 관련한 부품 수급은 베트남에서 수입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대대적인 정비 및 개조가 진행되었습니다.
↓ 남베트남 공군이 운영하였던 F-5 전투기
이에 중공군의 베트남 지역 내에서의 진격이 지체되자 초조함을 느낀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였으며 총 20만 명의 병력을 진격시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이러한 대공세에 베트남군의 방어선이 뚫렸고 동당과 몽까이가 중공군에게 함락당하였습니다.
베트남 군은 역공을 감행하여 1979년 2월 28일 동당을 다시 탈환하였으며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베트남군의 역공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 부터 한국전쟁 당시 투입된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사단이었던 제325사단과 제338사단을 주축으로 재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결국 중공군의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전멸되었고 랑선 도시는 함락당하였습니다.
↓ 랑선 전투에서 베트남 군을 상대로 승리한 중공군의 환호 모습
그러나 중공군은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였지만 피해가 심각하여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였으며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 군의 회군 목표는 달성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1989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이 철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