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박찬호에게 3연타수 홈런을 쳤던 야구 천재가 잊혀진 이유
||2025.09.08
||2025.09.08
1999년 겨울, 교통사고 소식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박정혁, 한때 고교 무대를 지배했던 ‘괴물 거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이제 전설이 되었지만, 남은 질문은 여전히 무겁다. 만약 그날의 ‘학폭’이 없었다면 그의 야구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989년 봉황대기 대회. 휘문고의 4번 타자 박정혁은 공주고를 상대로 무려 3연타수 홈런을 날렸다. 당시 상대 투수는 훗날 메이저리그의 ‘코리안 특급’으로 불리게 되는 박찬호였다. 이어 열린 8강 광주 진흥고전에서도 첫 타석에서 다시 홈런을 쏘아 올리며 고교야구 사상 첫 4연타수 홈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동료 류택현은 “120m 펜스를 훌쩍 넘겨 학교 옥상 꼭대기까지 공을 올리던 타자였다”며 그의 파워를 회상했다.
1990년 고려대에 입학하자마자 박정혁은 1학년임에도 당당히 4번에 이름을 올렸다. 고 임수혁, 마해영 등 당대 최고의 타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팀은 그의 장타력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전 OB 베어스 투수 김경원은 “분위기 메이커였고, 슬럼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1991년에 찾아왔다. 고려대 합숙소에서 선배와의 마찰 끝에 옥상으로 집합된 자리. 한 선배가 배트를 휘둘렀고, 이를 막던 박정혁의 팔꿈치는 그대로 부러졌다. 철심을 박는 수술과 끝없는 재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은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야구 천재의 시간은 서서히 멈춰 갔다.
재활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그는 LG 트윈스에 연습생으로 합류했지만 6개월 만에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스포츠 에이전시에서 일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리를 지킨 이는 대학·프로 시절 동료였던 서용빈뿐이었다.
야구계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만약 학폭이 없었다면, 그의 이름은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어떤 이는 “그런 시련조차 이겨내지 못했다면 원래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폭력은 결코 선수의 성장을 위한 과정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스포츠계가 반복해온 폭력의 굴레 속에서, 박정혁의 이름은 지금도 경종처럼 울린다. 고 박정혁 선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