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일을 진심으로 사랑해 동거를 선택한 유부녀의 최후
||2025.09.12
||2025.09.12
1960년대 북한 영화계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 중심에는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여배우 성혜림이 있었다. 1937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풍문여중을 다니다 월북한 그녀는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월북 작가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의 결혼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곧 그녀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이었던 김정일은 영화 제작을 지도하며 성혜림을 처음 만났다. 김정일은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던 그녀에게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5살 연상이었고, 친구의 형수였다는 사실은 이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성혜림을 이혼시키고 자신의 곁에 두었다. 1971년,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남 김정남이 태어났지만, 이들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김일성은 성혜림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김정일은 다른 여성과의 결혼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혜림은 불안과 고독에 시달리며 점점 병들어갔다.
김정일의 측근들은 이들의 관계를 “세기의 로맨스”라고 묘사했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과 욕망,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 김정일은 성혜림에게 “불쌍한 아우처럼” 느껴졌고, 두 사람은 “무척 잘 맞는 짝”이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냉대와 권력 다툼 속에서 성혜림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신경쇠약, 우울증, 불면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1980년대 초부터 모스크바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들 김정남을 그리워하며 외로운 나날을 보냈고, 결국 2002년 모스크바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성혜림의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고, 그녀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한때 북한 최고의 여배우였던 그녀는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혔고, 그녀의 삶은 역사 속으로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권력의 그늘에 가려진 한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기시켜준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1996년 망명하여 김정일과 성혜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폭로했다. 그녀의 아들 이일남은 대한민국으로 망명했지만, 1997년 암살당했다.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 역시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이들의 죽음은 김정일과 성혜림의 관계가 남긴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듯하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녀는 결국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한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성혜림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