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개봉] 박찬욱 감독 "영화는 나의 삶, 나역시 고용 불안 느껴"
||2025.09.24
||2025.09.24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 한다고 그런다면서요. 한국에서는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너 모가지야."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나오는 주인공 유만수(이병헌)의 대사다. 당초 박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으로 '모가지'를 하려고 한 이유를 이 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익히 알려졌듯, '어쩔수가없다'는 원작이 따로 있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가 그것으로, 원작의 제목인 액스는 도끼를 뜻하기도 하고 해고를 뜻하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영어로는 도끼가 해고로도 통하니까 모가지로 제목을 하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기겁을 했다"고 제목이 바뀌게 된 배경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후보로 '어쩔수가없다'와 '가을에 할 일' 두 가지로 좁혀졌고, 다수의 의견으로 '어쩔수가없다'로 결정됐다. '가을에 할 일'이 고려됐던 건, 주인공의 행위가 계절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다. '어쩔수가없다'를 띄어쓰기 없이 한 단어로 만든 것은 "아무 데나 툭 튀어나오는 감탄사 같은 뉘앙스"를 주기 위함으로 설명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올드보이'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거장 박찬욱 감독과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을 한 데 모은 작품으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필생의 프로젝트"로 알려지며 더 관심을 모았다. 박 감독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같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먼저 영화화한 그리스 출신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과 대담을 하며 "이 영화를 만들어 대표작으로 삼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작품이 바로 '어쩔수가없다'이다.
●거장도 피할 수 없는 '고용 불안'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몸 바쳐 일한 제지회사에서 해고당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재취업을 하려 하는 중산층 가장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실직 상태에 놓이면 불안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처지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 때는 사실상 실직 상태나 다름없는 감독의 마음을 끌었다.
"감독이 되기 전에 짧게 회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저희는 늘 잠재적인 고용 불안, 공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을 못 하겠지만 이병헌, 손예진 같은 배우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들 두려웠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아니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래서 (만수의 이야기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영화에는 주인공 만수뿐 아니라 만수처럼 종이를 만드는데 "목숨을 걸고" 종이를 만드는 것을 "삶 그 자체"로 여기는 인물들, 즉 만수의 경쟁자들이 잇따라 나온다. 그들을 가리켜 박 감독은 "제지업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들처럼 "영화가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딱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헛수고"로 꼬집은 부조리한 자본주의 시스템
'어쩔수가없다'는 실직 가장의 재취업 분투기를 그리지만, 사실은 종이와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의 '웃픈' 이야기다. 주인공이 종이와 가족을 끔찍이 사랑해서 끔찍한,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상황들이 벌어진다.
너무 예쁜 아내와 그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딸, 특히 아픈 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나고 자란, 어렵게 되찾은 집을 위해 재취업은 꼭 필요한 일이다. 다른 업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제지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 만수는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비밀이 늘어나고, 아내의 의심을 키우고, 형사까지 찾아오면서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재취업에 어렵사리 성공을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경쟁자다. 결국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지른 일들은 언제라도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영화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비춘다.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행위를 "헛수고"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말이라고도 했다.
"이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하다 보니 가족이 파괴돼요. 헛수고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 경쟁자를 제거했더니 그 다음에는 AI 경쟁자에게 밀려날 처지예요. 이것도 헛수고죠. 제가 이러한 부조리, 아이러니를 좋아합니다."
●AI(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거장의 자세
만수의 전쟁이 특히나 서글픈 건,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AI(인공지능)다. 영화는 만수조차 언제 AI에 대체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단 만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AI는 모든 산업의 화두이고, AI가 일자리뿐 아니라 인간의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영화계에서도 AI를 활용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등 먼 미래가 아닌 당장 닥친 현실의 문제다. AI는 원작에 없던 설정으로 '어쩔수가없다'에 시의성을 부여했다. 이를 영화의 주요 설정으로 만든 감독은 어떻게 바라볼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AI시대에 준비도 안 돼있고 나이도 들고 해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VFX나 DI 등과 같은 도구로서 다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 직업뿐 아니라 영상물의 미학 자체를 바꾸는 단계까지 가면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2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이병헌
영화는 이야기 흐름 상 어쩔 수가 없이 만수를 연기한 이병헌이 주도적으로 끌어간다.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와 2004년 '쓰리, 몬스터'에 이어 세 번째로 이병헌과 호흡을 맞췄다. 사석에서 자주 만날 만큼 가까운 사이지만 작품으로는 20년여 만에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박 감독은 20년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처음 영어 영화로 만들려고 했을 때 투자가 안돼서 무산됐다. 그러다가 한국 작품으로 만들면서 이병헌과 손잡고 지금의 '어쩔수가없다'로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이병헌은 전체 분량의 칠팔할을 이끌면서 미세한 눈빛과 표정 변화로 웃음과 비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이 작품을 온전히 표현해낸다. 이병헌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병헌씨가 '작품 한번 해야죠'라고 말할 때마다 '언제 나이 들어?' '빨리 좀 늙어'라고 말했어요. 사실 '도끼'를 일찍 만들었다면 병헌씨하고는 못 만났을 거예요. 그가 너무 젊어서.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 생각해 보면 이병헌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