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포테이토 지수 93%]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걸작
||2025.10.13
||2025.10.13
(영화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짧은 머리의 한 흑인 여성이 자동차가 질주하는 위험한 도로를 성큼성큼 걷고 있다. 긴장한 듯, 쫓기는 듯 보이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그 얼굴을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자 주변의 모습이 드러난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역, 이민자 수용시설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내 "혁명"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수용시설을 폭파해 이민자들을 구출한다.
수용시설을 점령한 청년 혁명 단체는 '프렌치 75'. 이에 소속된 폭탄 전문가 밥 퍼거슨(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시설을 파괴하고, 과격한 공격을 주도하는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시설을 지키는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의 총을 빼앗고 뒤 그의 자존심까지 짓밟는다. 이들이 얽힌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무너진 혁명가들의 이야기이자,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세상을 바르게 고치는 혁명이라는 거시적인 구호를 영화 내내 외치지만, 사실 세상을 향한 혁명보다 개인과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다. 동시에 현재 자국 우월주의로 치닫는 미국의 사회를 거침없이 풍자한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블랙코미디의 매력을 갖추고 쉴 틈 없이 이야기를 펼친다. 긴박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긴장감이 고조된 순간 어김없이 웃음을 터트리게 하면서 러닝타임 161분이 순식간에 흐르는 마법을 부린다.
범죄 액션 영화의 매력을 극대화한 '장르적인 쾌감', 백인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미국 사회를 향한 '날선 비판', 더 나아가 무너진 혁명을 딛고 다시 시작되는 혁명의 세대교체를 다루는 '메시지', 무엇보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부터 숀펜, 신인 체이스 인피니티까지 배우들이 '미친 연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수작이다. '매그놀리아'부터 '마스터'까지 자신의 인장이 확실한 작품으로 예술적인 성취를 거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연출작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가장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 배신과 세월 속에 사라지는 '혁명'이라는 이름
영화는 16년 전 밥과 퍼피디아가 프렌치75의 일원으로 '혁명'을 실행에 옮기는 과격한 모습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미국 제도권을 향한 공격을 일삼으면서 다양한 인종과 위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그 혁명 조직에 지독한 남성 우월주의자이자 인종 차별주의자인 군인 록조가 끼어든다. 퍼피디아에게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느끼는 록조와 그에 얽히는 퍼피디아로 인해 결국 밥과 어린 딸 윌라는 쫓기는 신세가 돼 16년간 은둔의 생활을 한다.
이민자들이 만든 동네에 은신해 혼자 딸을 키운 밥은 이제 혁명은 까맣게 잊고 약과 술에 취해 사는 무능한 아빠가 됐다. 영특한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는 아빠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고 충고도 하지만, 밥은 언제 다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딸을 과하게 보호할 뿐이다. 비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록조는 최상류층 백인 남성들로 이뤄진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는다. 이들은 록조에게 혹시 유색 인종과 데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지, 자녀가 있는지 등에 대한 묻는다. 순간, 16년 전 일들을 떠올린 록조는 혹시 모를 의문을 품고 밥과 윌라를 찾나 나선다. 이제부터 전쟁이다.
영화는 세 단계로 나눠 이야기를 진행한다. 밥과 퍼피디아가 혁명 단체에 헌신했던 '과거', 16년이 지난 뒤 뜨거웠던 혁명의 기억을 잊은 밥과 윌라의 관계를 그린 '현재', 그리고 록조에 납치된 윌라를 찾으려고 나선 밥의 분투와 록조에 맞서는 윌라의 이야기인 '미래'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무너진 혁명가들의 시선이 결국 '개인의 삶'으로 귀결됨을 알린다. 단, 그 과정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납치극과 추격전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시종일관 웃음이 터지는 것도 영화의 미덕이다. 과거 혁명 동지는 밥의 처지를 알고 16년 만에 전화를 걸어 집결지를 알려줄테니 우리만의 암호를 대라고 한다. 암호를 까맣게 잊은 밥은 거듭된 질문에 모른다고 소리칠 뿐이다. 방향을 잃은 밥을 안내하는 인물은 이민자들을 돕는 가라테 스승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 밥은 "센세이!"를 외치면서 세르지오를 따라다니고, 그럴 때마다 세르지오는 "여유를 갖으라"고 다독인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베니시오 델 토로의 호흡도 압권이다.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의 빛을 내는 덕분에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 후반부 카체이싱, 강렬한 몰입감 선사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백미는 후반부를 장식하는 카체이싱 장면. 액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 얼마나 더 새로울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자'들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압도적이 연출이다. 캘리포니아의 안자 보레고 사막 주립공원 도로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컴퓨터그래픽의 도움 없이 순수한 촬영으로 탁월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부딪히거나 서로 총격을 가하지도 않는다. 단 3대의 자동차가 열을 맞춰 질주할 뿐이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IMAX 스크린에서 본다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울렁거릴 수 있다.
물론 이런 기술적인 장치만으로 후반부 카체이싱 장면이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쫓는 자동차 추격전의 끝에서 윌라가 벌이는 일들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부모의 혁명을 거쳐 자녀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영화임을 이야기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초기작 '부기 나이트'부터 '데어 윌 비 블러드' 등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워낙 뚜렷해 대중을 아우르지는 못했다. 이번엔 다르다.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서사, 각자 욕망과 목표 앞에서 분주하게 길을 찾는 캐릭터들을 통해 더 많은 관객에게 이번 작품을 보게 하려고 단단히 작정했다.
또한 각 장면과 대사 곳곳에 수수께끼 같은 메타포를 숨겨 놓아 두고두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무엇보다 지금 미국 사회를 반추하는 거울 같은 설정들로 풍자의 미덕을 더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으로 명명된 상류층 백인 남성 집단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들'을 듣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진다. 영화에도 관세를 부과하는 등 여러 면에서 압박을 가하고, 이민자를 냉대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분명 싫어할 영화다.
이른 감이 있지만 내년 미국 아카데미상의 주요 부문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 같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숀 펜 가운데 남우주연상 후보는 누가 될지, 모든 게 궁금해지는 영화다.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 출연 :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레지나 홀, 테야나 테일러, 체이스 인피니티 / 제작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 장르 : 범죄, 액션 / 개봉 : 10월1일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61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