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가 갑자기 한국 독립군이 된 이유
||2025.10.19
||2025.10.19
1905년, 일본 육사에 입학한 조선 청년 김경천은 제국의 군복을 입은 ‘엘리트 장교’였다. 그러나 그가 배운 총검술은 결국 조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청년은 원수의 군복 안에서 독립을 준비했다. 일본군 기병 소위로 복무하며 7년 동안 군사 전술을 익힌 그는, 적을 알아야 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1919년, 때가 왔다고 판단한 그는 휴가를 가장해 귀국했다. 낮에는 도박과 당구로 헌병의 눈을 속이고, 밤에는 동지들과 탈출을 모의했다. 후배 지청천과 함께 국경을 넘어 만주로 향한 그날부터 그의 삶은 전쟁이었다.
김경천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며 조선 청년들에게 군사학을 가르쳤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 소비에트 혁명군과 손잡고 일본군 및 백군과 싸웠다. 그때 그를 따라 싸운 병사들은 “백마를 탄 김장군이 나타나면 전황이 뒤집혔다”고 증언했다. 마적을 토벌하기 위해 창해청년단을 조직했고, 직접 선두에 서서 총을 쏘았다. 시베리아 설원 한가운데서 그는 백마를 몰며 조선 독립군을 지휘했다. ‘백마장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1921년, 연해주의 빨치산스크 일대에서 그는 고려의병대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는 직접 사관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했고, 올가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다. 불과 200명의 병력으로 700명의 연합군을 무너뜨린 ‘이만 대첩’은 조선 독립전쟁의 결정적 승리로 기록된다. 그러나 영웅의 끝은 초라했다. 1930년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의 첩자’로 몰렸다. 김경천 역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어린 딸들은 낯선 땅에서 언어를 잃었고, 아내는 구경농장에서 물을 나르며 생존했다. 김경천은 모스크바 감옥으로 이송되어 8년형을 선고받은 뒤, 시베리아 북부 철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굶주림과 혹한 속에서 194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펠라그라, 영양실조였다. 시신은 트랙터에 실려 들판 어딘가에 묻혔다. 묘비도 이름도 남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카자흐스탄에 흩어진 후손들이 그의 일기 ‘경천일록’을 발견했다. 러시아어로 번역된 일기에는 전투 기록과 동지들의 이름, 가족에게 보낸 편지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후손들은 국가안전위원회 자료를 통해 그의 사진과 취조조서를 확인했다. 그는 끝까지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일본군 복무 시절부터 연해주 한인 독립군과 연락을 유지해 왔다.
김경천은 적국의 군복을 입고, 적의 언어로 독립을 준비한 장군이었다. 해방 후 군복만 갈아입었다면 권력을 쥘 수도 있었지만, 그는 시베리아 설원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는 길을 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