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일본의 뿌리인 한국인들 정체
||2025.12.24
||2025.12.24
동아시아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늘 민감하다. 특히 일본 왕실의 기원과 한반도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감춰지거나 축소돼 왔다. 윤명철 사마르칸트대 교수는 한 강연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과거 아키히토 전 일왕은 공식 석상에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 왕실 스스로가 백제 혈통과의 연결을 언급한 이 발언은 큰 파장을 낳았다. 윤 교수는 이 발언의 핵심을 혈통 자체보다 권력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고대 일본에서 천황가는 단독 지배 세력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외척 권력을 쥔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가와 반복적으로 혼인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이 후지와라 가문이 친백제계 세력이었다는 점은 일본 왕실 내부에 백제계 혈통이 깊숙이 스며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일본이라는 국호의 탄생 역시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본’이라는 이름은 670년 무렵에 처음 등장한다. 그 이전 일본 열도는 국제적으로 ‘왜’로 불렸다.
백제 멸망 이후 대규모 유민 이동이 결정적 계기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무너지자 수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이미 건너가 있던 세력과 새로 유입된 백제·고구려계 유민들이 결합하면서 기존 체제로는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의 일본이다.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동쪽에 위치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국호 변경은 단순한 명칭 변화가 아니라 권력 재편과 정체성 선언이었다.
한반도 세력의 일본 열도 진출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기원전 4~3세기 야요이 시대부터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이동했다. 이들은 단순한 이주민이 아니라 기술과 문명을 함께 가져간 집단이었다.
벼농사를 위한 볍씨, 철기와 청동기 기술은 일본 사회의 생산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농업과 무기 기술의 전파는 소국 형성과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 고대 국가 형성의 토대가 이 시기에 마련됐다.
진출 경로도 분명했다. 전라남도 계통의 세력은 큐슈 북서부, 특히 나가사키 일대로 향했다. 경상도 계통은 대마도를 거쳐 후쿠오카와 시마네현 일대에 정착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소국을 세우고 교류망을 형성했다.
윤 교수는 식민사관의 대표적 산물인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비판한다.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당시의 국력과 항해 기술을 고려하면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술과 인구, 문명 수준은 한반도가 우위에 있었다.
그는 이를 모자 관계로 설명한다. 한반도의 국가들이 어머니 국가가 되고, 일본 열도에 세워진 소국들이 자식 국가로서 성장했다는 체제 이론이다. 이는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협력과 분화의 관계였다.
이 관계는 670년 이후 급변한다. 일본 국호 성립과 함께 백제 유민이 주도한 신흥 국가는 자신들을 멸망시킨 신라를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한일 관계는 동맹이 아닌 경쟁과 대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윤명철 교수는 고대사를 단순한 승패의 역사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가 누구를 지배했는지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 흐름 속에서 한반도 세력이 일본 열도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아는 것이야말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