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뻐서 일제 장성들 마저 줄서서 만나려 했던 조선 기생의 정체
||2025.12.26
||2025.12.26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기생은 늘 가장 먼저 손가락질받는 존재였다. 권력자 곁에서 웃고 술을 따르는 모습은 조국을 잃은 현실과 겹쳐 더욱 천박하게 소비됐다. 김영화 역시 그런 시선 속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영화는 스무 살에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불리며 일제 고위 관리와 일본 장성들의 신임을 얻었다. 매일 밤 다른 권력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철저히 계산된 위장이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술자리는 가장 경계가 풀리는 공간이었다. 김영화는 일본 군부 인사들의 말과 행동을 기억했고, 흘러나온 군사 정보를 독립군에게 전달했다. 동시에 수배 중인 독립투사들을 은신처로 숨기는 역할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제의 삼엄한 통제 속에서도 위생 검사를 이유로 이동이 가능했던 기생들은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김영화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기생이기 전에 조선의 딸임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그날 그녀는 치마폭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냈다. 기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시위에 즉각 폭력으로 대응했다.
김영화는 곧 체포됐다. 혹독한 폭행과 고문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동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이 또 다른 저항이 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녀는 같은 시기 옥고를 치르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갇혔다. 옥중에서도 김영화는 조선의 딸로 태어나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은 동료들에게 버팀목이 됐다.
끝내 김영화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천민으로 불리던 신분의 굴레를 넘어 그녀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다. 김영화의 이름은 기생이 아닌 독립운동가로 기억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