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오래전부터 매년 중국의 국고를 야금야금 털었던 우리 조상님들
||2026.01.05
||2026.01.05
과거 조선이 명나라 등에 바쳤던 ‘조공’이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 ‘남는 장사’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흔히 조공을 약소국이 강대국에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불공정 계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고도의 실리 추구가 담긴 무역의 형태였다는 분석이다.
조선이 조공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른바 ‘대국의 체면’이 있었다. 중국 황실은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위신을 세우기 위해 ‘후왕박래(厚往薄來, 갈 때는 적게 가져가나 올 때는 후하게 받음)’의 원칙을 지켰다.
이에 따라 소국인 조선이 가져온 조공품 가치보다 몇 배나 더 값비싼 비단, 서적, 약재 등을 하사품으로 내려주어야만 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구조를 영리하게 활용하여 매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오히려 부담을 느낀 쪽은 대국인 명나라였다. 명나라는 재정적 타격을 줄이기 위해 조선 측에 “제발 자주 오지 말아 달라”고 읍소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은 1년에 세 번씩 찾아오는 조선 사절단에게 재정 부담을 이유로 “이제는 3년에 한 번만 오라”고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외면한 채 “사대의 예의를 다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1년에 세 번 방문하는 ‘1년 3사’를 고수하며 하사품을 챙기는 집요함을 보였다.
명나라의 고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해를 메우기 위해 조선에 “자잘한 물품 대신 금과 은을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나, 조선은 “우리나라는 금이 나지 않는다”고 호소하며 실제로 금광을 폐쇄하는 등의 강수를 뒀다.
결국 세종 대에 이르러 금·은 조공을 면제받고 대신 말이나 포(布)로 대체하는 실리를 끌어냈다. 당시 중국 역사서인 ‘명사(明史)’ 등에 “조선 사절단은 한 무리가 가면 또 다른 무리가 온다. 북경에 아주 자리를 깔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조선의 방문은 명나라에 큰 재정적 골칫거리였다.
결국 명나라는 조선과의 불리한 조공 무역으로 국력을 점진적으로 소모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파병과 대규모 대민 지원까지 단행하며 재정적 위기를 맞았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던 조선 조상들의 영리한 외교 전략이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