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만나고 싶어서 전투기 타고 탈북 시도한 북한 조종사의 최후
||2026.01.07
||2026.01.07
어머니를 찾기 위해, 그리고 억압된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던 북한 조종사의 영화 같은 일생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한국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불과 두 달 뒤인 1953년 9월 21일 오전 9시 24분, 21세의 젊은 북한군 조종사 노금석 상위는 소련제 미그-15(MiG-15bis) 전투기를 몰고 김포공항에 긴급 착륙하며 전 세계를 경악게 했다.
노 씨의 탈북 결심은 해방 직후부터 싹튼 확고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체제의 모순을 목격하며 “국경이 막힌 이곳에서 비행기를 타야만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조종사가 된 이유 또한 오직 자유를 찾기 위함이었으며, 북한에서 비밀리에 VOA(미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며 외부 세계와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을 키워왔다. 1953년 9월의 어느 날, 비행 준비가 완료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고, 포상금의 존재조차 모른 채 오직 자유와 월남한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사선을 넘었다.
평양 순안 비행장을 이륙해 단 17분 만에 김포에 도착한 그는 기체에서 내리자마자 어머니를 목놓아 불렀다. 이 비행은 단순한 망명을 넘어 냉전사에서 손꼽히는 정보전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당시 미군은 공산 진영의 핵심 전력인 미그-15를 확보하기 위해 10만 달러의 포상금을 건 ‘무라 작전(Operation Moolah)’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 씨는 당시 한국 1인당 GDP의 약 1,500배에 달하는 거액을 거머쥐게 되었고,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승인 아래 10만 달러(현재 가치 약 120만 달러 이상)를 지급받아 어머니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얻어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제2의 인생은 눈부셨다. 그는 델라웨어 대학교 항공공학과를 졸업한 뒤 보잉, GM, 록히드 마틴 등 세계적인 항공·자동차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활약했다.
이후 엠브리 리들 항공대학교에서 17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항공 전문가들을 양성했다. 또한 VOA 방송을 통해 ‘자유의 일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북한 주민들에게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노 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에서 살던 시절은 하루하루가 공포였다”고 회상하며, 한 번의 용기 있는 선택이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가문의 역사를 바꾸었음을 강조했다. 북한군 조종사에서 미국의 항공우주 석학으로 거듭난 노금석 교수는 지난 2022년 12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