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고위급 간부만 13명 제거” 총사령관까지 제거한 이 ‘군인’
||2026.01.13
||2026.01.13
6·25 전쟁 당시 백골병단을 이끌며 조선인민군 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 강칠성 대좌를 비롯해 고위 간부 13명을 사살·생포한 채명신 소령은 한국전쟁 레전드로 남았다. 38세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설악산 전투에서 북한 핵심 지휘부를 초토화하며 남침 작전 축을 꺾었고, 5·16 당시 박정희와 인연 맺어 군사정권에도 관여했다. 제주4·3과 전쟁고아 길원팔 생포 등 전설적 업적은 한국 현대사에 깊이 새겨졌다.
1951년 초 강원도 설악산 일대에서 채명신 소령은 반공 청년·피란민으로 백골병단을 창설했다. 북한 조선인민군 유격대가 설악 능선 장악하자 특공대 이끌고 매복 작전 돌입, 전령 덮쳐 69여단 본부 위치 파악했다.
유엔군 폭격 후 돌입해 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 중장 사살, 참모장 강칠성 대좌 포함 고위 간부 13명 제거·11명 생포했다. 채명신은 “적 지휘부 초토화가 전세 역전” 평가받았다.
백골병단은 적지 생존율 90%로 전설 됐다.
설악산 전투에서 길원팔은 채명신 특공대에 포위, 자결 기회 줬으나 사살됐다. 채명신은 “군인으로서 경례”하며 그의 군인다움 인정했다. 길원팔은 전쟁고아로 채명신 휘하 복무하며 아들처럼 따랐으나 적으로 재회했다.
이후 청천강 전투서 포위당한 21연대장 구출, 중공군 물량전서 대대원 50명만 살려 남침 축선 차단했다. 육사 동기 김영직과 송악산 고지전서 가슴 맞고도 승리했다.
채명신 전투력은 9사단 박정희 사단장 눈에 띄었다.
1948년 제주4·3 당시 채명신 중위는 남로당 장악 부대서 고립, 상관 문영길 중대장 암살 위협 속 생존했다. 부대원 반란 막으며 “북괴뢰군 실상” 설득했으나 일부는 한라산 도주했다.
민가 포위당해 자살 시도했으나 권총 불발·부하 정용식 만류로 탈출, 제주 반공 상징 됐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북진 중 개성 송악산 4중대장으로 고지 탈환했다.
채명신은 “적진서 살아남은 유일한 장교”로 불렸다.
1961년 5·16 당시 채명신 대령은 조창대 편지로 박정희 밀서 전달받고 망설임 끝 36연대·35연대 병력 이끌고 서울 진입했다. 미군 CIC 계획 누설에도 이한림 사령관 설득 성공했다.
쿠데타 초기 5인위원회 위원으로 군사정권 수립 공로 인정, 중장 예편까지 군 생활 지속했다. 9사단 시절 박정희 인연이 쿠데타 동기였다.
베트남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파월 한국군 사령관 됐다.
1965년 맹호부대 38세 소장 채명신은 청조강 전투 등에서 월맹군 격파하며 베트남 최다 전과 기록했다.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으로 전사자 최소화하며 “철혈 사령관” 칭송받았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대면하며 작전 자율성 확보, 월남전 한국군 위상 높였다. 전쟁 후 외교관·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육군장으로 장례 치러졌다.
채명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서 특공대 지휘하며 설악산 전투 승리, 5·16 가담으로 군사정권 기반 닦았다. 제주4·3 반공·청천강 구출 등 전투 불패 신화다.
길원팔 사살 등 13명 고위 간부 제거 업적은 한국전쟁사에 영원히 남았다. 2013년 87세 서거 후 육군장으로 예우됐다.
그의 백골병단은 자유를 지킨 전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