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가족들의 이후의 충격적인 삶
||2026.01.18
||2026.01.18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변곡점 중 하나로 기록된 10.26 사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중앙정보부 수장이었던 김재규가 상관을 향해 총구를 겨눈 사건은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반역’과 ‘의거’라는 극단적인 평가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암살자라는 낙인 뒤에 가려진 인간 김재규의 면모와 그가 떠난 후 남겨진 가족들의 처절한 삶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고향(경북 선산) 출신이자 육군사관학교 2기 동기생으로, 박 전 대통령이 “자네는 나의 분신”이라 부를 만큼 각별한 신뢰를 보냈던 인물이다. 군에 입문하기 전 안동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가난한 제자들의 수업료를 남몰래 대신 내주던 따뜻한 스승이기도 했다.
이후 군 요직과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그는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온건한 성향을 지녔던 그는 유신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과 민주화 열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특히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과의 권력 다툼, 그리고 민심의 이반을 외면한 채 차지철의 강경론에만 귀를 기울이던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은 김재규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현장을 직접 확인한 김재규는 유화책을 건의했으나,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는 차지철의 광기 어린 주장과 이를 묵인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훗날 법정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재현될 것을 우려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회고했다.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18년 철권통치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거사 직후 중정(남산)이 아닌 육군본부로 향한 김재규의 판단 착오는 그를 혁명가가 아닌 ‘대통령 살해범’의 위치로 떨어뜨렸다.
김재규의 사후, 남겨진 가족들의 삶은 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신군부의 탄압 속에 전 재산을 몰수당한 유족들은 수십 년간 감시와 은둔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모친인 권유분씨는 아들의 사형 집행 이틀 전 면회에서 “충신으로 눈을 감았을 것”이라며 끝까지 신뢰를 보냈던 어머니는 기이하게도 21년 뒤 아들이 거사를 치른 날과 같은 날인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김재규의 부인은 남편의 명령을 따르다 희생된 부하들의 자녀들을 남몰래 지원하며 헌신했다. 그의 동생인 한규씨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긴 뒤 수도자의 길을 택했으며, 형이 거사 전부터 “군인 정치는 끝나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지난 2020년, 김재규의 유족들은 당시 재판이 불법적인 개입 속에 불공정하게 치러졌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그날의 진실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다시 성찰해 보자는 간절한 호소다.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신자로, 누군가에게는 독재의 사슬을 끊어낸 인물로 기억되는 김재규. 그가 당긴 방아쇠가 한국 현대사를 급선회시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극적인 시대를 관통한 한 남자의 고뇌와 그 가족들의 아픔은 여전히 우리 현대사의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