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군번 없는 목숨 걸고 휴전선” 넘나든 비밀 전사들
||2026.01.22
||2026.01.22
청계산 깊은 골짜기 속 비밀 공작훈련소에서 시작된 북파공작원들의 운명은 지옥의 문이었다.
육군 첩보부대 HID 산하에서 10개월간 혹독한 산악훈련과 침투기술을 주입받은 이들은 철조망·부비트랩·지뢰밭 돌파를 반복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북한군 1사단보다 앞서야 한다는 명령 아래 피범벅이 된 등을 굳은살로 바꾸며 단련된 그들은 학생·농부·북한군으로 위장, 군번조차 없이 사선을 준비했다.
북한 1사단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노리다 김신조 1명만 생포된 1968년 1·21 사태는 북파공작의 도화선이었다.
이에 격분한 군부는 청계산 부대에 “북한 특수부대 압도” 명령을 내리고, 김신조를 직접 때려가며 시범훈련을 실시해 공작원들을 재교육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학살과 프레블로호 납치로 긴장 고조된 상황에서 그들은 휴전선 중부전선을 직접 뚫고 들어가 보복 테러를 강행해야 했다.
작전명 ‘청룡’으로 1965년 8월 30일 밤 중앙분계선 200m 남쪽에서 출발한 Y공작조는 지뢰탐지기를 들고 한 발짝씩 북진했다.
안개 속 북방한계선까지 56m 간격 유지하며 기어간 그들은 공민증·노력수첩 탈취와 DMZ 전선 철조망 실태 파악을 주임무로 삼았다.
배고픔에 송충이를 구워 먹고 뗀마 고무보트로 동해 침투한 공작원들은 “강소에 가지 마라” 노래 소리 속에서 적 초소 근처를 꽁지빠는 생존술로 목숨을 걸었다.
68년 11월 13일 작전명 ‘황소공작’으로 평강 지역에 투입된 북파공작원들은 손찰 중이던 소련 고문단과 북한군 30여 명을 크레모어 지뢰와 총격으로 섬멸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열흘 만의 즉각 보복으로 북한 12사단 진지를 폭파한 이 작전은 남북 교전 최대 위기 속 국가 생존을 챙긴 전설적 전과였다.
북한군 사업수첩 7건 탈취와 진지 사진 촬영까지 완수한 그들은 역경로로 남하하며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 돌아왔으나, 국가 기록에서도 지워졌다.
공작원들은 적 체포 시 자결 원칙으로 권총 한 발과 극약을 지참했다. “살아서 잡히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라”는 명령 아래 실패는 죽음만을 의미했다.
평양 김일성 집무실 폭파 ‘황금박쥐’ 계획부터 노동당 간부 납치까지 치밀한 공작계획서가 작성됐으나, 발각 시 총번 제거한 북한제 소총으로 자폭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칠용사로 불린 7인조 중 박수천 등 대부분이 동료 사망과 반복 북파로 정신적 붕괴를 겪었으나, 맹세 “대한의 최선두에서 용감히 싸우겠다”로 버텼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남한으로 귀환한 공작원들조차 “정전협정 위반” 명분으로 군번·계급 없이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7,726명이 실종 처리된 채 유가족만 방치됐다.
“누구를 위해 북파했나” 분노하며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보다 가혹한 배반 세월을 보냈고, 청계산 충원탑은 그들이 스스로 세운 유일한 위령제였다.
HID 교육대 출신 300여 명이 전쟁 중 원산 교두보 확보와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호림부대처럼 집나간 배로 침투하다 전멸한 비극이 반복됐다.
김정 소령 등 초기 대장들은 “죽을 때까지 보내고 돌아오지 않을 때까지” 반복 투입 명령에 죄책감을 토로하며 훈련 미흡으로 부하 희생을 한탄했다.
박수천 일기 “바람처럼 적 심장 관통하리라, 대한의 칠용사” 노래는 사라진 동지들을 애도하는 마지막 유산으로, 배신감 속에서도 애국심을 지킨 증언이다.
2026년 현재 청계산 훈련소 폐허에 남은 “나를 따르라” 현수막은 계급 없는 비밀전사들의 피로 새긴 분단체제 희생을 영원히 증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