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4천명 막아냈다” 70년전 한국을 지켜낸 ‘전쟁 영웅’ 대체 누구길래?
||2026.01.27
||2026.01.27
1951년 5월 26일, 단 240명으로 4천 명의 중공군을 막아낸 ‘가평 전투’의 주역이었던 미국 프랭크 댈리 중령. 그 전설적인 인물의 증손자가 지금 한국에 와 있다. 이름은 키튼 댈리, 현재 20살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소속 선교사로 부산에서 활동 중이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땅에서 이제는 평화와 믿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총 대신 성경을 든 그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 전쟁과 평화를 잇는 특별한 이야기로 읽힌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다. 70여 년 전 가족이 목숨 바쳐 지킨 땅에, 이제는 후손이 사랑을 전하러 온 것이다.
가평 전투는 단순한 교전이 아니었다. 제213야전포병대대는 350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830명을 생포하는 압도적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사학자들도 입을 모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비대칭적인 승리’라고 평가한다.
당시 부대 지휘관이었던 댈리 중령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보다 병사의 생명을 우선시했다. 이 부대는 대부분이 유타주 시더시티 출신의 청년들로 구성돼 있었고, 신앙 공동체로서도 강한 결속을 자랑했다. 그들의 헌신과 전략, 그리고 운명이 합쳐진 결과가 ‘가평 기적’이었다.
가평은 단순한 지역명이 아니다. 서울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유엔군 전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213대대는 다른 부대의 엄호 없이 고립된 채 협곡을 따라 침투한 중공군을 막아냈다. 댈리 중령은 “오늘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명령과 함께 밤샘 전투를 이끌었고, 이는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한 번의 승리로 유엔군은 북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가평이다. 이제는 그 치열했던 전장이, 참전 기념비와 추모 행사가 열리는 성지로 남아 있다.
키튼 댈리는 한국에 자원해 온 것이 아니다. 교회 본부의 배정 시스템에 따라 무작위로 파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한국으로 발령을 받은 순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증조할아버지의 군번표를 몸에 지닌 채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가평 전투 74주년 기념식에서는 가족 대표로 연설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의 존재는 단순히 가족사를 넘어, 한미동맹과 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키튼은 말한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불가능은 없다.”
한국 정부는 2015년 프랭크 댈리 준장을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가평군과 시더시티는 자매결연을 맺었고, 양 지역에는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 40사단은 가이사중고등학교(현 가평고등학교)를 설립해 지금까지 장학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연결고리의 중심에는 댈리 중령과 그의 후손 키튼이 있다. 키튼은 한국인들의 친절과 놀라운 발전을 보며, 증조할아버지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유를 다시금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한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며, 귀국 후 건축학을 전공해 언젠가 다시 한국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