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때 가족 버리고 월북한 엄마가 北의 국민배우 된 소식을 들은 연예인
||2026.02.20
||2026.02.20
원로 배우 양택조의 삶 뒤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화려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던 사연과, 이후 북한에서 ‘인민배우’가 된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이 재조명되고 있다.
양택조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꽃’이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우 문예봉이다. 양택조가 불과 7살이던 해, 어머니 문예봉은 남편인 극작가 양백명과 자식들을 남겨둔 채 돌연 월북을 선택했다. 어린 아들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당시 문예봉의 월북은 예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녀는 북한으로 넘어간 뒤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활동을 이어갔으며,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부여받는 등 북한 영화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어머니가 떠난 후 양택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꼬리표는 냉전 시대 한국 사회에서 견디기 힘든 멍에였다. 양택조는 과거 한 방송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갔다는 원망이 컸다”며,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진 한 장 귀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가 성인이 되어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어머니의 존재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특히 북한 방송이나 선전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어머니의 소식은 그에게 그리움보다는 혼란과 아픔을 더 크게 안겼다.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어머니와, 남한에서 밑바닥부터 연기 인생을 일궈온 아들의 평행선은 한국 전쟁이 남긴 잔혹한 유산이었다.
시간이 흘러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시기, 양택조는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등을 통해 어머니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만남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문예봉은 1999년 평양에서 사망했으며, 양택조는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채 북측 관계자를 통해 비보를 전해 들어야 했다.
양택조는 최근까지도 방송을 통해 “어머니를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어린 자식을 떼어놓고 간 그 마음만은 여전히 아프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심경을 전했다. 대중에게 웃음을 주는 배우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이면에는, 분단국가의 아픔이 투영된 한 개인의 서글픈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