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조 기업이 될 뻔했던 한국의 어느 기업
||2026.02.21
||2026.02.21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지형도를 뒤흔든 역사의 변곡점은 1999년 청와대에서 시작됐다.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정부는 대기업 간의 중복 투자를 정리하기 위해 이른바 ‘빅딜’을 추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는 바로 반도체였다. 당시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생존을 건 단일화 압박 앞에 섰다.
당시 분위기는 현대에 우호적이었다. 현대그룹이 정부의 대북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사는 결국 미국 컨설팅 기관인 ADL(아서 디 리틀)의 비교 평가를 통해 승자를 가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결과는 현대전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현장 실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내려진 결정에 LG는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사업에 열의를 쏟았던 구본준 사장은 미국 법원에 고소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하며 결과를 부정했다.
하지만 정부의 압박은 거셌다. 계속된 거부는 그룹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고, 결국 LG는 눈물을 머금고 지분 100%를 모두 넘기며 반도체 사업에서 손을 뗐다. 이 결정은 LG그룹 역사상 가장 뼈아픈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승기를 잡았던 현대전자는 불과 2년 뒤인 2001년 자금난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후 반도체 부문은 하이닉스로 분사되어 독자 생존의 길을 걷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SK그룹에 인수되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시가총액 수백 조 원을 넘나드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당시 LG의 선택이 가지는 무게감은 더욱 실감 난다.
만약 그때 LG가 반도체 사업을 유지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 재계 순위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 번의 정책적 결정과 시대적 상황이 600조 원 가치의 기업 주인을 바꾼 셈이다.
결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제로 내려놓아야 했던 반도체의 꿈은 오늘날 LG에는 뼈아픈 실책으로, SK에는 천운의 기회로 기록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