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기 시절 미국에서 일본인 역할만 맡아 연기한 한국 배우의 정체
||2026.02.21
||2026.02.21
1930년대 미국 할리우드 거리. 한국인 청년 한 명이 길을 지나갈 때면 인근 동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퍼부었다. 스크린 속에서 늘 악랄한 일본군 장교나 비열한 일본인 악당 역할만을 도맡아 했던 그를 향한 분노였다.
미국인들에게는 ‘증오스러운 일본 놈’으로, 조선인들에게는 ‘나라를 팔아먹는 광대’라며 경멸당하며 그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모욕과 수모를 묵묵히 견뎌냈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수록 그는 더욱 악착같이 연기했고, 그렇게 번 막대한 출연료를 챙겨 들었다. 그가 일본 군복을 벗고 촬영장을 나서는 순간, 할리우드에서 벌어들인 거액의 자금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상해 임시정부였다.
이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은 바로 독립운동의 거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 ‘안필립’이었다. 아버지가 조국 독립을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 정작 독립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때, 아들은 적국의 군복을 입는 치욕을 감내하며 그 빈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반드시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의 이름 ‘필립(必立)’은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심어준 그 이름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며, 스크린 안에서는 가장 미움받는 악당으로 살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보다 뜨거운 애국자로 살았다. 동포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는 남몰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그림자 독립군’의 길을 택했다.
안필립은 이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배우가 되었다. 차가운 보도 위 새겨진 그의 별이 오늘날 유독 빛나 보이는 이유는,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던 숭고한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에게 쏟아진 동포들의 침을 눈물로 닦아내며, 그는 매일같이 일본군 장교의 칼을 찼다. 그것은 조국을 향한 가장 고독하고도 강인한 투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