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한국 병원을 쳐들어왔지만” 북한군을 단번에 제압한 ‘한국의 여 간호사’
||2026.04.29
||2026.04.29
1950년 포항 형산강 전선 인근 야전병원은 총성과 신음이 뒤섞인 또 다른 전장이었다. 이곳에서 백골부대 간호장교 오금손 소위는 부상병을 돌보면서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북한군의 위협과 맞서야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국광복군이었던 오수암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되찾고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고 회고한다. 간호전문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이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주저 없이 수도사단 백골부대 간호장교로 자원입대한 배경에도 그런 집안의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1950년 8월 초,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 중 오금손 소위가 근무하던 야전병원은 북한군 약 1개 분대의 기습을 받았다. 수술대 위의 부상병과 의료진이 그대로 인질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부상병 옆에 놓여 있던 카빈 소총을 집어 들고 병원 입구를 향해 뛰어 나갔다.
짧은 교전 끝에 북한군 6명을 사살했고, 나머지 3~5명은 그의 맹렬한 사격에 눌려 병원 밖으로 도주한 것으로 공식 기록에 남아 있다. 국가보훈부와 언론은 이 장면을 두고 “간호사가 아닌 완전한 전사로 변해 환자를 지켜낸 순간”이라 평가하며, 그를 ‘총을 든 나이팅게일’이라 부르게 됐다.
오금손 소위의 사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성 군인들의 활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기간 동안 간호장교·여자의용군·여학생 학도의용병 등으로 참전한 여성은 1,700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통계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간호장교는 약 1,200여 명이 임무를 수행하며 39만 명이 넘는 전상자를 돌본 것으로 집계된다. 이들은 야전병원 간호뿐 아니라 후송·정훈·정보·유격 지원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면서 실제 전투지역을 수차례 오가는 고강도 임무를 수행했다.
형산강 야전병원 방어전 이후 오금손 소위는 2계급 특진으로 대위가 되었고, 이후에도 최전선과 바로 맞닿은 후방에서 부상병 치료를 계속했다. 북진 과정에서 금화·철원 인근 K고지 전투를 지원하던 중 북한군 포로가 되어 격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으나, 군사 정보를 누설하지 않고 버틴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적군이 교전에 휘말린 틈을 타 탈출해 부대로 복귀한 뒤 다시 야전병원 업무에 복귀했고, 결국 부상 악화로 군을 떠날 때까지 전장을 지켰다. 보훈 당국은 “광복군 시절 혹독한 사격·체력 훈련이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전역 후에도 오금손 대위의 삶은 전장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국 부대를 돌며 5천 회가 넘는 안보 강연을 진행해 “백골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후배 장병과 청년들에게 6·25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했다.
강연에서는 북한군의 병원 기습과 포로 경험뿐 아니라, 제대로 된 의료 장비조차 없이 부상병을 살려야 했던 현실과 동료 간호장교들의 희생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동시에 독립운동가 지원, 보훈가족 복지, 지역사회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며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도 군인의 임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2004년 11월 4일, 오금손 대위는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부와 국방부는 그를 ‘3월의 6·25 전쟁영웅’, ‘여성 군인의 롤모델’로 선정해 다큐멘터리·전시·군 교육자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 삶을 알리고 있다.
군사학계와 여성사 연구자들은 오금손 대위를 “여군이 단순 보조 인력이 아닌, 전투와 지휘, 교육까지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인물”로 평가한다. 북한군이 병원으로 들이닥친 절체절명의 순간, 한 간호장교가 보여준 결단과 사격은 지금도 “내 환자는 내가 지킨다”는 말과 함께 전군 교육현장에서 되새겨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