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하면 “한국이 그냥 만든다” 프랑스의 핵심 기술을 4년 만에 자체 개발한 ‘이것’
||2026.05.01
||2026.05.01
KAI는 4월 21일 회전익 항공기 동력전달장치의 핵심 모듈인 주기어박스를 국내에서 조립하고 지상 시운전에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업은 2021년 1단계에 착수한 이후 4년 반 동안 진행됐고, 20여 개 국내외 협력사와 200명 이상 전문 인력이 투입됐다. 주기어박스는 터보샤프트 엔진에서 나오는 수만 RPM의 고속 회전을, 메인로터가 사용할 수 있는 수백 RPM 저속·고토크로 바꿔주는 장치로, 헬기에서 사실상 엔진 다음으로 중요한 ‘심장 전달기’에 해당한다. 비행 중 이 부품이 고장 나면 곧바로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어, 세계적으로도 극소수 기업만 제작·검증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재 헬기용 주기어박스를 제대로 설계·생산할 수 있는 회사는 미국 GE·벨, 프랑스 에어버스 헬리콥터,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독일 ZF 등 손에 꼽힌다. 이들 업체는 수십 년간 치형 설계, 열처리, 베어링 배열, 윤활·냉각, 진동 감쇠 같은 노하우를 축적해 왔고, 수만 시간 실증 데이터를 바탕으로 신뢰성을 입증해 기술 장벽을 쌓아 왔다. 한국은 KHP(한국형 헬기 사업) 당시 수리온을 만들면서 유로콥터와 대규모 계약을 맺었지만, 파워전달계통과 기어박스 핵심 기술은 끝내 이전받지 못했다는 비판이 2010년대 내내 제기됐다. 그 결과 수리온의 기어박스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2016년 유럽 EC225 슈퍼푸마 기어박스 결함 사고 이후 한국군도 같은 계열 수입 기어박스 사용 기체의 비행을 전면 중단하는 사태까지 겪었다.
기어박스를 외국 업체에 의존하면, 단순 부품 구매 차원을 넘어 운영 전반이 제약을 받게 된다. 수리온은 군·관 양쪽에서 운용 중이지만, 기어박스 창정비·부품 교체는 프랑스 측 일정·가격에 맞춰야 했고, 고장·결함 논란이 터질 때마다 안전성·품질 보증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반복됐다. 해외 수출을 추진할 때도, 기어박스·로터마스트 등 핵심 비행부품에 제3국 부품이 들어가 있으면 원제조국 정부의 재수출 승인을 받아야 해, 한국이 독자적으로 수출 패키지를 설계하기 어려웠다. 조선일보·파이낸셜뉴스 등은 이로 인한 손실과 기회비용이 수천억 원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국산 헬기라면서 가장 중요한 심장은 남의 것을 쓰는 구조”라고 꼬집어 왔다.
이 한계를 넘기 위해, 방위사업청·국방기술진흥연구소와 KAI는 2021년 ‘수리온 성능개량용 동력전달장치 개발’ 1단계에 착수해 주기어박스 상세 설계와 핵심 부품 33종 국산화에 도전했다. 2023년에는 2단계 협약을 체결해, 동력전달장치를 구성하는 7개 모듈(주기어박스, 중간기어, 테일기어 등) 전체 부품 개발과 MGB 조립·기본 성능시험까지 범위를 넓혔다. 이번에 KAI가 보여준 전략의 핵심은, 완전히 새로운 기종용 기어박스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운용 중인 수리온에 최소 변경만으로 장착 가능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국산 기어박스가 양산 단계에 들어가면, 기존 수리온 기체에 순차적으로 교체·적용해 창정비 시점에 맞춰 자연스럽게 성능 개량을 할 수 있게 된다.
KAI와 국방기술진흥연구소는 2028년까지 국산 동력전달장치로 다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히 수입품을 대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T700‑701K 엔진의 원래 출력(약 22,000파운드)을 기존 해외산 기어박스 한계(19,200파운드 수준)보다 더 가깝게 활용해, 수리온의 적재량과 운용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창정비 주기가 두 배로 늘어나면, 헬기 한 대가 평생 받는 정비 횟수와 비용이 크게 줄어 전 수명주기 비용(LCC)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이를 위해 KAI는 극한 온도·습도·진동·모래먼지·염분 등을 인공 재현하는 가혹 환경 시험을 거쳐, 실전 수준 내구성과 신뢰성을 입증한다는 계획이다.
국산 동력전달장치 개발이 완성되면, 그 쓰임새는 수리온 개량에만 머물지 않는다. KAI는 이 기어박스 기술을 활용해 관용·소방헬기의 물탱크 용량 확대, 유무인 복합운용(MUM‑T) 시스템 탑재 여유 중량 확보, 해상·산악 구조용 특수 장비 탑재량 증대 등을 추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2030년대 도입을 목표로 하는 차세대 고속중형헬기(High‑Speed Medium Helicopter) 개발에도 동일 계열 기술을 적용해, 고속 비행에 적합한 고출력·고신뢰성 기어박스를 단계적으로 진화시키겠다는 청사진도 제시됐다. 이렇게 되면 엔진을 제외한 기체·로터·동력전달계통 대부분을 한국 기술로 설계·생산하게 돼, 헬기 한 대를 거의 ‘완전 국산 패키지’로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KAI 김종출 사장은 “기술 난도가 높은 동력전달장치 국산화를 위해 힘쓴 KAI 임직원과 협력사, 관계 기관에 감사한다”며 “이번 주기어박스 국산 개발 성공은 국내 방위산업 기술 자립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산 기어박스·동력전달장치를 손에 쥐게 되면, 수리온·파생형 헬기를 해외에 팔 때 더 이상 프랑스 정부와 에어버스의 수출 승인에 발목 잡힐 일이 줄어들고, 가격·정비 조건에서도 훨씬 유연한 패키지 제안이 가능해진다. 한때 기술 이전을 거부당하며 “안 주면 한국이 그냥 만들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던 입장에서, 이제는 오히려 한국이 기술과 부품을 공급하며 제3국 헬기 개발·개량 사업의 파트너를 노려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