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만들고 상왕처럼 살았던 형의 비극적인 최후
||2026.05.05
||2026.05.05
1935년 일본 오사카 빈민가에서 태어난 소년 이상득은 일제 강점기 시절 가난한 조선인 부부의 사남삼녀 중 차남으로 성장했다. 해방 후 귀국길에 오른 가족의 배가 대마도 인근에서 좌초되며 전 재산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져 포항에 정착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아버지는 남의 목장 일을 하고 어머니는 과일 행상을 하며 일곱 남매를 힘겹게 먹여 살리는 처절한 생존 투쟁을 이어갔다.
한국 전쟁의 비극 속에서 동생을 잃은 슬픔을 겪은 이상득은 시장에서 뻥튀기와 과일을 팔며 집안의 생계를 돕는 억척스러운 청년기를 보냈다. 명문 포항고 대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지상고를 선택할 만큼 영특했던 그는 육사 14기에 합격했으나 훈련 도중 부상으로 자퇴하는 시련을 맞았다. 좌절하지 않고 독학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하는 기적을 일궈냈으며 동생 이명박의 학업을 이끈 정신적 지주이자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냈다.
1961년 한국 나이롱 공채 1기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공장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섬유 공정 전체를 몸소 익히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유의 추진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입사 17년 만에 코오롱 대표 이사 사장에 오르는 샐러리맨 신화를 썼다. 치밀하고 결단력 강한 경영인으로 평가받던 그는 기업인으로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고향인 경북 영일 울릉 지역구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그는 포항의 절대 권력자였던 박태준 명예회장의 그늘 아래에서 몸을 낮추며 기반을 닦았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신한국당 핵심 요직을 거쳤으며 거물급 정치인들이 떠난 포항의 진정한 일인자로 군림하게 됐다. 주말마다 지역구를 직접 챙기는 바닥 민심 행보와 예산 확보 능력으로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내리 6선 의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IMF 외환위기 당시 금융개혁법 통과를 위해 여야의 대립을 중재하며 국가적 위기 극복에 앞장선 합리적 보수의 면모를 보여주어 정적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는 자신의 모든 정치적 자산을 쏟아부어 동생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권의 산파가 됐다. 당시 유력 대권 주자의 형임에도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전국 사찰을 누비는 헌신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으나 이는 훗날 거대한 권력의 그림자로 남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그는 실질적인 정권의 2인자인 상황으로 불리며 인사와 정책을 막후에서 조종한다는 만사형통의 주인공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자신의 이니셜을 딴 SD 라인과 영포라인이 국정을 장악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소장파 의원들로부터 권력 사유화의 주범으로 몰려 정계 은퇴 압박을 받았다. 자신을 대통령의 뒷떨거지라고 낮추어 부르며 저항했으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영일대군의 위세는 서서히 비극적인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2012년 저축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고 현직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헌정 사상 최초로 구속되는 수모를 당했다. 평생을 바쳐 일궈낸 동생의 정권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채 수의를 입게 된 그의 모습은 권력의 무상함과 형제 정치의 비참한 끝을 상징했다. 퇴임 후 옥고를 치른 동생과 검찰 조사를 받은 큰형 등 삼형제 모두가 포토라인에 서는 가문 최대의 비극을 맞이하며 영광은 상처로 변했다.
2024년 10월 파란만장했던 89세의 생애를 마감한 그의 빈소에서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형의 희생과 헌신에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다. 기업인으로서 성공하고 동생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가족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역사적 오명과 영광을 동시에 안고 떠난 한국형 정치의 자화상이었다. 경제 전문가이자 노련한 정치인이었던 그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화려한 성공 신화와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고스란히 투영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