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은 주말에 국민 앞에 90도 사과했는데…사촌 정용진은 어디?
||2026.05.23
||2026.05.23
글로벌 경기 침체와 예측 불가능한 시장 환경 속에서 기업의 위기 관리 능력은 곧 생존과 직결된다. 특히 기업 오너이자 최고경영자(CEO)가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보여주는 리더십의 형태는 기업의 브랜드 가치뿐만 아니라 여론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정적 분수령이 된다. 최근 나란히 대국민 사과와 직면했던 범삼성가의 두 주역,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행보는 ‘CEO의 품격과 위기 대응의 정석’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삼성전자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총파업 위기에 직면했던 순간, 이재용 회장이 선택한 것은 ‘정면 돌파’와 ‘무한 책임’이었다. 해외 출장 중이던 이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일정을 급거 변경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김포공항 입국장,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세 차례에 걸쳐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 회장의 사과가 대중과 노조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요인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닌 책임의 주체를 자신으로 한정한 데 있었다. 그는 “매서운 비바람은 제가 맞고, 모든 문제를 다 제 탓으로 돌리겠다”라며 조직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아울러 “노조와 회사는 한 몸이며, 삼성인임을 자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대화와 내부 결속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이 전격적인 등판은 글로벌 빅테크 공급망 불안을 우려하던 전 세계 고객사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신의 한 수’가 되었고, 파업 기류로 경직됐던 노사 교섭의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 마중물이 되었다. 과거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삼성서울병원의 관리 책임을 통감하며 대기업 오너로서 이례적으로 고개를 숙였던 리더십의 연장선으로, 여론은 그의 진정성에 호의적인 평가를 보냈다.
반면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회장은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마케팅 논란으로 거센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진행된 텀블러 이벤트에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듯한 문구가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며 시민사회의 분노를 촉발한 것이다.
논란이 확산하자 정 회장은 손정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이사와 담당 임원을 전격 해임하고, 관련 임직원 전체에 대한 강력한 징계 절차에 착수하는 등 발 빠른 ‘인적 쇄신’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있어서도 안 되고 용납될 수도 없는 부적절한 마케팅이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론의 시선은 싸늘함과 호불호로 갈렸다. 정 회장이 전면에 나서 사과를 하기 전, 계열사 대표와 실무진을 즉각 해임하는 거친 방식이 선행되면서 일각에서는 ‘총수가 직접 책임을 지기보다 뒤에서 직원들을 자르며 꼬리 자르기로 무마하려 한다’는 날 선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더욱이 과거 SNS를 통해 ‘멸공’ 등 이념적 분열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수차례 ‘오너 리스크’를 자초했던 전적이 재조명되면서, 이번 사태 역시 오너의 평소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며 이념적 갈등을 재점화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과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리더로서의 품격과 진정성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셈이다.
두 총수의 사과 리더십 차이는 그들이 걸어온 사업적 행보와도 궤를 같이한다.
이재용 회장은 시스템반도체, 바이오, AI 등 대한민국 경제의 생명줄이자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하는 고부가가치 미래 먹거리 사업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비록 기술 경쟁과 사법 리스크 등 숱한 난관이 있었으나, 철저히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전략적 판단과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며 선 굵은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정용진 회장의 신세계는 대형마트(이마트)와 이커머스(SSG닷컴), 백화점 등 철저히 내수 기반의 유통업을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최근 쿠팡, 알리·테무 등 국내외 이커머스 공룡들의 거센 공세와 극심한 내수 침체 속에 본업인 유통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위기 타개를 위해 정 회장이 최근 강력한 인적 쇄신과 구조조정 중심의 비상 경영을 선언했으나, 근본적인 성장 모멘텀을 제시하기보다 내부 직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조정에만 치중한다는 안팎의 우려를 낳고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엄한 아랫사람 문책으로 채워진 사과는 결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재용 회장은 모든 비바람을 자신이 맞겠다며 책임을 자신에게 수렴시켰고, 결과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돌려세웠다. 반면 정용진 회장은 실무진 해임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책임의 화살을 분산시켰고, 이는 과거 오너 리스크와 맞물려 여론의 반발을 심화시켰다.
위기의 순간에 총수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진정한 CEO의 품격은 책임을 떠넘기는 칼날이 아닌, 모든 비바람을 홀로 감내하겠다는 무거운 ‘오너십’에서 비로소 증명된다는 것을 두 사촌 형제의 행보가 여실히 웅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