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지원 감독 ‘비광‘, 무너진 가족 세우려다 무너진 긴장감
||2026.08.25
||2026.08.25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가족을 묶는 힘이 반드시 혈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낳은 정과 기른 정 가운데 무엇이 더 깊은지 묻고,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소재 자체는 충분히 감성적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품은 정서에 비해 그것을 영화적으로 밀어붙이는 힘은 아쉽다.
‘비광‘이 ‘미쓰백’(2018)으로 주목받았던 이지원 감독의 차기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던 만큼 더욱 그렇다. ‘비광’은 톱스타 부부였던 중구(류승룡 분)와 남미(하지원 분)가 중구의 딸 동주(김시아 분)의 등장으로 파경을 맞은 뒤 8년이 지나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동주가 우림천 여중생 사망 사건 용의자로 휘말리고, 중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다. 한때 등을 돌렸던 남미 역시 그의 곁을 맴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부분은 중구와 동주의 부녀 연기다. 류승룡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딸을 향한 마음만큼은 애잔한 중구를 애틋하게 표현했다. 김시아도 극적인 상황에 놓인 동주의 불안과 혼란을 무리 없이 받아냈다. 김선영, 김해숙, 김영민, 유재명 등 주변 인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에 힘을 보탠다. 적어도 배우들의 앙상블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동주를 둘러싼 여중생 사망 사건이 충분한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동주가 겪는 위기는 인물의 삶을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만, 영화가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움이나 압도적인 흡인력을 발견하기 어렵다. 앞서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진 소재라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아쉽다. 사건사고를 바라보는 새로운 접근법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신선한 전개 방식이 필요한데 ‘비광’은 그 지점에서 평범하다.
아쉬운 인물은 남미 역의 하지원이다. 영화는 중구와 이혼한 후 나락으로 떨어진 남미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웠다. 남미의 헝클어진 머리와 공허한 눈빛, 위태로운 표정으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추락을 시각화했다. 그러나 외형적인 변화만이 캐릭터의 내면을 대신할 수 없다.
남미가 8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중구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너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아파”라는 대사 역시 남미의 상처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 동주를 향한 남미의 감정이 보는 이들에게 깊숙이 스며들지 않는다.
하지원의 연기가 남미 캐릭터에 결정적인 한 방을 만들어내지 못해서일까. 강렬한 헤어스타일과 촌스러운 의상으로 남미의 추락과 변화를 강조했지만, 정작 인물을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할 연기에서 확실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원이 올해 방송된 이지원 감독의 드라마 ‘클라이맥스’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진 톱배우를 연기했던 만큼 이미지 측면에서도 신선함이 적다.
이지원 감독이 지난 24일 열린 언론배급시사회에서 “하지원의 욕 연기는 20점”이라고 농담 섞어 평가했는데 욕 연기 하나가 아니라 하지원표 남미가 보는 이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하지원의 연기력과 인물의 존재감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지 못한 셈이다.
‘비광’은 좋은 배우들이 받쳐주고 있음에도 영화 전체를 끌어올릴 중심이 흐릿하다. 류승룡과 김시아가 만들어내는 부녀의 감정 연기에 진심은 느껴지지만, 이를 둘러싼 사건의 밀도와 남미의 서사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다.
‘미쓰백’(2018)에서 각 인물들의 상처와 비애를 날카롭게 포착했던 이지원 감독이 이번에는 가족의 정과 상실을 이야기했다. 다만 전작에서 보여준 날것의 감정과 단단한 시선은 상대적으로 옅어졌다. 좋은 배우들과 감독만으로 훌륭한 가족 누아르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작품이다.
러닝타임 109분. 9월 2일 극장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