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망하자, 중학생때 속옷 모델한 소년…아시아 최고 한류 스타 되다
||2026.10.08
||2026.10.08
귀공자 같은 수려한 외모와 당당한 애티튜드 때문에 흔히 ‘모태 금수저’로 오해받지만, 배우 장근석의 성장기는 극과 극을 오갔다. 실제로 그는 초기 유년 시절 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진 건축 사업과 부친의 대규모 양어장 운영 덕분에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 부친의 사업이 연이어 부도를 맞으면서 집안 환경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가재도구마다 압류 딱지가 붙고 전 재산을 잃은 가족은 단돈 20만 원만을 쥔 채 서울로 쫓기듯 상경해야 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대를 잡고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아역으로 활동하던 장근석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특히 중학생 시절 그가 촬영했던 주니어 속옷 광고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일화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 또래 친구들의 놀림을 감수하고 속옷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지만, 당장 가족이 머물 방 한 칸의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장근석은 훗날 방송을 통해 당시 받은 계약금 200만 원으로 겨우 1년 치 월세방을 얻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었다고 담담히 회상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며 치열하게 버텨낸 그는 탄탄한 연기력을 밑거름 삼아 성인 연기자로 안착했다. 그리고 2009년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의 ‘황태경’ 역으로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을 뒤흔들었다.
특히 일본 현지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원조 한류스타 배용준(‘욘사마’)의 뒤를 잇는 2세대 한류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현지 팬들로부터 ‘근짱’, ‘아시아 프린스’라는 독보적인 애칭을 얻었다.
4만 5천 석 규모의 도쿄돔 단독 콘서트를 단숨에 매진시키는 등 그가 세운 독보적인 흥행 기록들은 당시 K-콘텐츠 시장의 외연을 대폭 확장하는 결정적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의 정점에서도 그를 향한 시선이 늘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제스처와 싸이월드 시절 남겼던 감성적인 글들이 온라인상에서 희화화되며 ‘허세근석’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당시에는 유독 ‘남자들이 싫어하는 배우’라는 억울한 프레임에 갇히기도 했다.
장근석은 이러한 편견과 조롱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신을 향한 인터넷 밈과 비판을 오히려 예능과 다양한 방송에서 유쾌하게 스스로 패러디하고 인정하며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혔다.
부유했던 유년기에서 하루아침에 닥친 부도로 가세가 기운 순간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속옷 모델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치열했던 시간은 오늘날 흔들리지 않는 배우 장근석을 만든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