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바티칸시국)을 제외하고 이혼이 불법인 유일한 나라 필리핀에서 이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현지 여성·인권 단체는 법안의 하원통과에 환호하고 있지만 보수적 성향의 의원들과 종교 단체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상원 통과와 실제 합법화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26일 필리핀뉴스에이전시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필리핀 하원은 지난 22일 제3독회에서 이혼 합법화 법안을 찬성 131표·반대 109표로 통과시켰다. 지난 2018년 해당 법안이 상원에서 좌절된 이후 6년 만에 다시 하원을 통과한 것이다.
인구의 약 80%가 가톨릭인 필리핀은 종교의 영향으로 낙태와 피임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이혼도 금지하고 있다. 현재 필리핀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의 적용을 받는 무슬림만이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다. 그 외에 부부가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혼인무효인데 소송에 수년이 걸리는 데다 비용도 만만치 않아 일반 서민들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가정 폭력과 학대에 시달려도 이혼이 불가능한 필리핀의 현재 상황에서 '여성을 학대적인 관계로부터 해방시키고 존엄성과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이 법안은 또 다른 '희망'이다. 로비단체 '오늘날 필리핀을 위한 이혼'은 "우리는 축하할 준비가 됐다. 다음 단계는 8월에 있을 상원 청문회"라며 하원 통과 환영과 함께 투쟁을 이어나가겠단 입장을 밝혔다.
여성·인권 단체들은 "현행법에 따라 혼인 무효와 법적 별거가 가능하지만 두 가지 모두 제한적이고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기혼 남성은 사진과 같은 정황 증거만으로도 배우자를 간통죄로 고소할 수 있지만, 기혼 남성들은 다른 여성과 같은 집에 살거나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입증돼야만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보수적 성향의 의원들과 종교 단체의 압력으로 상원 통과에는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의 알베르토 위 주교는 "국회의원들이 이혼법 대신 결혼을 지원하고 가족제도를 강화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의 복지를 보호하는 정책·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데 집중할 것을 촉구한다"며 "이혼을 조장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의 결속력을 무너뜨리고 도덕적 가치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