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전쟁]④ 엑셀·QR코드의 성공 비결 ‘표준’… 신기술 상용화에 필수
||2024.05.31
||2024.05.31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자사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엑셀)의 파일 포맷인 ‘XML’을 국제표준화기구(ISO)에 표준으로 제안했다. 표준화 작업을 통해 오피스 오픈 XML 표준이 만들어졌고, ISO 29500으로 등록됐다. 일본의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 ‘덴소’의 로봇 자회사인 ‘덴소웨이브’는 이차원 바코드 양식인 ‘QR코드’를 개발했다. 덴소 측은 QR코드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QR코드는 ‘ISO/IEC 18004′으로 국제 표준이 됐다.
표준으로 지정된 이후 XML과 QR코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한국을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소프트웨어 회사가 XML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출시했지만, MS의 오피스 프로그램 시장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QR코드는 스마트폰 확산과 함께 대중적인 정보 전송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XML과 QR코드는 “특정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면 후발 기술이 새로운 표준이 되기 전까지 해당 기술이 시장을 장악한다”는 표준 업계의 통념을 증명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 기업 참여 저조한 K-표준 논의… “신기술 상용화 발목잡기도”
정부가 첨단산업 분야 글로벌 시장 선점을 위해 기업의 표준화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 표준화를 통해 수익은 늘리고 비용은 절감한 기업의 사례를 교육해 기업인들이 표준 활동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표준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 적어, 국제 논의에서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는 게 목표다.
31일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에 따르면 한국은 2023년 기준 82건의 국제 표준을 제안했다. 이 중 기업이 제안한 표준은 12건으로 14%에 불과하다. 국표원 관계자는 “국내 산업계의 국제표준화 활동이 미국, EU, 일본 등에 비해 현저히 저조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 EU, 일본 등 표준 선진국의 기업들은 신기술을 개발하면서 해당 기술의 국제 표준화를 동시에 추진한다. 기술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표준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국내에선 표준화에 대한 인식이 떨어져 개발한 기술을 상용화하는 게 지연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연료전지 기업인 P사는 지게차용 연료전지 시스템을 기술 개발해 확보했으나, 상용화가 지연됐다. 개발한 기술의 안정성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P사의 기술 상용화가 지연되는 동안 외국의 한 업체가 비슷한 기술을 개발했고, 국제 표준화까지 추진했다. 국제 표준은 경쟁업체가 제안한 안이 반영됐다. P사는 결국 경쟁사가 제안한 표준에 맞춰 시스템을 다시 설계해 안정성을 인정받고 연료전지 시스템을 상용화할 수 있었다. 기술을 먼저 개발해놓고도 표준의 중요성과 표준화 방법을 몰라 시장 선점 기회를 날린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표준은 신기술과 신제품의 상용화와 가장 밀접한 영역”이라며 “가장 많이 활용되는 표준 영역이 바로 제품의 성능과 안전성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평가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P사가 기술 개발 초기부터 상용화에 필요한 표준 개발을 추진했다면 상용화를 앞당기고, 시장 지배력도 훨씬 강해졌을 것”이라며 “표준화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기업을 대상으로 한 표준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돌입한 상태다.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장은 “국제 표준 전문가를 통해 표준화 동향을 확인하고, 기업들에 대한 수요 조사를 통해 어떤 표준을 개발해야 하는지 미리 파악하려고 한다”면서 “경영자 대상 표준 교육과정을 확대하고 차세대 국제표준 전문가 양성 등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표준화기구 내 韓 영향력 확대해야… 첨단분야가 블루오션”
특정 기술에 대한 규칙과 규범을 정하는 국제표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표원 관계자는 “국제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에 속한 기술위원회에서 회원국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 제정된다”고 설명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국가 간 표준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은 ‘미국보험협회안전시험소’(UL),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구를 통해 국제표준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정부의 지원 하에 기술위원회에서 인해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EU 국가들은 유럽 연합에 속한 국가들과 협력해 국제표준화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은 국표원을 중심으로 표준 업무를 하고 있지만, 국제 표준 논의에서는 후발주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표준 전문가들은 “국제표준 선점을 위해선 국제표준화기구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기술위원회에 참가한 국가들의 지지와 협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ISO, IEC 등 국제표준화기구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선 국내 전문가의 기술위원회 의장, 간사 등 수임을 확대하는 한편, 주요 국가와의 표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여건은 긍정적이다. ISO 신임 회장으로 조성환 전 현대모비스 대표가 올해부터 임기를 시작했고, ISO와 IEC의 모든 정책위원회에 한국인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표준화 초기 단계인 첨단산업 분야에서 기술위원회 신설과 적극적인 국제표준 제안 등을 통해 기술위원회 의장과 간사 등을 맡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란 조언도 나온다. 실제로 한국은 양자기술 기술위원회 신설을 주도했고, 지난 2월 이해성 전주대 교수가 이 위원회의 의장을 맡게 됐다.
표준 선진국과의 협업도 중요하다. 국표원에 따르면 올해 7월 한·중·일 3국이 표준 분야 관심사를 논의하는 동북아 표준협력이 개최된다. 2002년 출범한 이 회의체는 올해로 22회째를 맞는다. 11월에는 독일과의 표준화협력포럼이 예정돼 있다. 미국과도 지난 2021년부터 한미 표준협력포럼을 개최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양자기술, 탄소 중립 분야의 표준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다.
